[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2

  • 독고탁
  • 입력 : 2017.04.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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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서다-2] <2편, 여름, 첫만남2>

바람이 분다. 윗동네 궁동산 공원을 쏜살같이 내려와 골목길 사이를 우~웅 하고 소리 내더니 남자의 콧구멍으로, 허파로, 가슴을 타고 창문으로 사라진다. 여름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남자는 꿈을 깼다. 밤사이 테라스가 젖어 있다. 새벽 5시. 희뿌연 여명이 골목길에 내려앉은 시각. 침침한 시야를 눈곱을 떼며 초점을 맞춰 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룬 지난밤, 끈적한 몸을 이끌고 얕은 골목길이 내려다보이는 이층집 난간에 기댄 채 선 남자에게, 바람 한 점 없는 여름 새벽은 덥기만 하다. 어제저녁 과음의 흔적이 아직 코끝에서 달금하게 퍼져나간다.

아이와 아내는 늦게까지 잠을 설쳐서인지 아직 곤하게 잠들어 있다. 거실로 내려와 엉거주춤 커튼을 열어젖힌다. 여전히 희뿌옇다. 꿈일까? 기대일까? 욕망일까? 습관일까? 멈췄던 여름비가 사부작 다시 내리는 마당으로 나와 남자는 반팔티를 벗어 던지고 비를 맞는다. 새벽비다. 어깨와 등짝에 몇 개의 빗방울이 와 닿을 때마다 움찔하며 후회의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제의 자신감은 새벽비에 녹아 물먹은 잔디 사이로 흘러내린다. 그녀를 만나기 일주일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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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_곰장어집에서1>

그녀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그녀를 만나러 떠난 길은 꽤 멀었다. K는 왜 이 길을 나섰을까? 답을 알 수 없는 길이 이상하게 속으로는 쉽게만 느껴진다. 그동안 사람을 잃었고 사람을 얻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남자는 바쁘게 일상을 보냈다. 그 일주일이 억겁의 시간으로 느껴지던 찰나에 K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강남의 어느 연탄구이 집으로 정했다. 크, 연탄구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동네 맛집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였다. 그 전문가는 K가 누굴 만날지 알 길이 없기에 자기가 생각했을 때 K에게 어울리는 쪽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K는 연탄구이가 어울리는 이미지라는 거다. 물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했던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540미터 정도 높이의 비봉산이 우뚝 솟은 '부리기'라는 마을이 K가 태어난 곳이다. 촌 냄새 나고, 지방 출신 인상이 무척 풍기다 보니 사람들은 나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강남은 회의 때문에 자주 넘어가긴 하지만 늘 어색하고 남의 동네에 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강남에 K는 회의나 공식 행사가 아닌 그녀를 만나러 간다. 강남에 연탄구이는 어색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하고 신선하지 않은가~. 일주일 동안 회사 업무는 이래저래 다 망했다. 제안서를 한 건 마무리했고, 직원이 몇 명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면접을 봤다. 사람을 잃고 얻는 것이 일주일 동안 벌어졌다. 즐겨 입는 하늘색 셔츠를 팔랑이며, 택시에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딱 맞는 노래가 생각나서였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K의 손에 장미꽃은 없었지만, K는 강남의 길거리도 오늘만은 어색한 것이 아니라 좋게만 느껴졌다. 하늘의 구름이 보이지 않는 저녁 시간이지만, 뭉게구름이 택시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가게는 저만치 아직 떨어져 있었지만, 100미터 전의 K에게 곰장어 타는 냄새가 마중을 나왔다.

<2편_곰장어집에서2>

그녀의 도톰한 입술은 오뉴월의 물오른 버들강아지처럼 싱싱해 보였다. 윗입술 가운데 살짝 뾰족하게 돌기가 있어 뽀뽀를 한다면 그 부분만 빨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눈은 크지 않은 듯 시원하고, 콧날은 높지 않은 듯 직선으로 길다. 턱선은 부드러운 듯 갸름하고, 피부는 세월을 잊은 듯 매끈했다. 약간 붉은 듯한 얼굴색은 희지도 검지도 않게 적당했다.

어색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K는 열심히 곰장어를 이리 뒤집고, 뒤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뒤집곤 했다.

그녀의 이력은 대단할 것도, 눈여겨볼 것도 없지만, 대략 이렇다. 여대를 나와 H대학교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전시 큐레이터를 거쳐 지금은 기업의 브랜디드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마케팅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하나 있고, 직원이 10여 명 되는데 모든 일은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고, 안됐을 만큼 일중독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아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세계관을 지닌 듯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내 여자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어도 가끔 술 한잔 하고 싶은 동무로는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난번 물기 없이 만났던 이후로 한 달쯤 지났으니 툭 나올 만한 대화의 시작이었다. "바쁘게요. 안 바쁘세요?" 비슷하지는 않지만 알 만한 분야에 종사하는 둘에게는 바쁜지 안 바쁜지가 큰 인사다. 소주병의 소주가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술이라도 먹어야 술기운에 실수 같은 대화도 가능할 것 같아서다.

둘은 직원들이 자신들 마음 같지 않다는 둥, 회사 운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둥 시시콜콜 일상의 대화로 들어갔다.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었어요. 동갑이기도 하고, 회사 이야기, 하는 일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았어요." "아 네, 저도 주변에 동갑의 여자 CEO는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럼 좋죠."

그녀의 목소리는 가는 듯 뚜렷했는데, 가끔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도 다 아는 듯한 표정으로 열심히 듣고 또 반응했다. 약간 붉은 끼가 얼굴에 드리우자 아까보다는 더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K는 술을 먹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여자랑 단둘이 소주를 마시는 상황이 마음을 들뜨게 해서 그렇게 보였을까?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K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착각을 하면서, 최대한 좋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 자책을 하는 순간 소주 두 병이 비워졌고, 곰장어는 무슨 맛인지 모르게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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