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3

  • 독고탁
  • 입력 : 2017.05.0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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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3] <3편, 여자의 눈물>

취기가 오르자 남자는 대범해졌다. 말이 많아진 것은 물론 곧잘 분위기를 끌고 갔으며,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남자 K의 성격은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술 한 잔이 들어가면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기질이 있다.

가난했지만, 고집스럽게 서울의 대학교로 혼자 올라와 고시 합격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입학 후 한 달 만에 그 꿈은 꾸지 않은 꿈이 됐다. 1991년의 대학교는 과도기였다. 늙수그레한 복학생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신입생들과 밤새 토론을 하는가 하면, 알록달록 맘껏 뽐낸 옷차림의 새내기들은 압구정동에서 야타족을 흉내 내기도 했다. 수업은 여전히 재미없었지만, 공부에 매진하는 도서관파도 생겨났고, 입시 해방감을 누리며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진지한 이들도 있었다. 학생운동은 1980년대처럼은 아니지만 활발했고, 사회 변화의 주동이었다. K는 동아리 활동 대신 대학신문사를 택했다. 글 쓰는 대학생 기자는 나름 매력이 있어 보였다. 수업은 수강신청 카드를 내는 것으로 그만이었고, 교수는 "K는 누구냐"며 없는 K를 수업시간에 찾곤 했다. 그해 봄,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던 현장에서 새내기 K는 '열사를 살려내라'며 종로에서 충무로로, 을지로에서 시청으로 쫓겨 다니고 있었다. 전경들이 쫓아오면 도망가려고 힘들게 담장을 넘는 꿈을 아직 꾼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다. 하지만 K는 늘 무언가로부터 소외받고 있다는 자책을 하며, 마음 편한 대학생이 되지는 못했다. 열등감이 원인이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을 움켜쥐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고, 그 끝은 세상과의 타협이었다. 이런 살아온 이야기는 재미없을 거라며, 그녀에게는 겉으로 듣기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소주를 더 시킬까 하다가 초면에 과도한 음주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줄 것 같다고 자제하며 둘은 커피 한 잔을 더했다.

강남의 넓은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2층 창가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K는 찬찬히 다시 그녀 S를 훑어 보았다. 손은 작으면서 약간 살이 붙어 예뻤고, 단발머리는 숱이 많아 얼굴을 더 작게 보이게 했다. 아, 디자인을 전공해서인가 대충 걸친 듯한 옷들이 서로 잘 어울려 감각적인 패션을 연출하고 있었다. 비싼데 비싸 보이지 않고, 싸구려인데 싸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요즘 무엇이 제일 고민인가요?" 남자가 진지해졌다. "외로운 거요…." 둘은 순간 그다음 이야기를 까먹은 듯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다 외로운 거죠…." 남자는 건성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런가요? 곧 쉰인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다 보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는 속으로 많은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제 술 한 잔 나눈 사이에 외롭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곰곰 생각했다. '내가 좋다는 건가, 40대 여자가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인가' 생각하다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같은 학번인 아내는 다른 대학교에서 대학생 기자를 했고, 그 바람에 우리는 친구처럼 지내다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 17년 동안 열심히 살았고 아이들도 이제 제법 성인이 돼서 큰 속 썩이지 않고 지내고 있었지만, 아내는 가끔 외롭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 어쩌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외로운 것을. K가 귀찮다고 생각하며 창가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여자의 눈에서 맑고 하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심쿵하다는 요즘 아이들 말이 딱 어울리게 남자는 얼어붙었다. 미안해 하며 물기를 쓱 닦아내던 S는 애써 미소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는 투로 뭔가 들켜버린 것에 대한 후회를 담아 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일어설까요?" 여자가 먼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는 듯이 제안했다. '뭐지?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그만 집에 가자고?' 뻘쭘한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여자를 따라 일어섰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그 뒤꽁무니를 남자는 헛헛하게 바라보았다. 곰장어와 커피가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오늘 저녁이 무엇에 홀린 듯 아득해져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반포대교를 넘어오는 순간 남자는 보았다. 한강에 비친 달이 파르르 떨며 외로워하는 모습을. 그 풍경이 흡사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도 한강에 비친 달이 외로워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거다. 어쩌면 앞으로 그 외로움을 서로 달래기 위해 계속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남자는 생각하며 택시 안에서 잠이 들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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