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4

  • 독고탁
  • 입력 : 2017.05.2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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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서다-4] <4편, 낮술>

가을이 오려는지 겨드랑이에 고이던 습한 끈적임이 없어졌다. 직원들은 막바지 여름휴가를 보내러 떠났고, 이른 추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 K는 가을을 좋아했다. 가을을 힘들어하면서 좋아했다. 가을이면 인생이 허허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 답답함과 뻑뻑한 가슴의 통증을 오히려 좋아했기 때문이다. 앞머리가 조금씩 빠지면서 나이를 먹는 것을 느꼈다. 사라진 머리카락은 다시 나올 생각이 없다는 듯이 반지르르했고, 거울에 비친 주름과 흐릿한 검버섯을 보며 또 세월을 미워했다.

40대 남자면 한창 때라고들 하지만, 인생의 중반전에 접어들고부터는 새로울 것도, 도전하고픈 의욕도 없음을 스스로 발견하곤 한다. 비스듬히 위태롭게 서 있는 시골길의 전신주 같다고 할까! 그 위에 앉아 있는 까치 몇 마리의 무게도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 ….

그럴 때면 K는 술 먹는 날이 잦아졌다. 아내와의 다툼도 덩달아 잦아졌다. 술을 먹은 날에는 욕을 섞은 잠꼬대를 한다며 아내는 핀잔을 주었다. K는 K대로 화를 냈다. 40대 가장의 삶의 무게는 안 보이냐는 투로. 그래도 K는 가을을 좋아했다. 산들바람을 쐬러 떠날 수는 없었지만 하늘이 멀리 높아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세상과 멀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으며, 어쩌다 시골 논두렁 길에 차를 세우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 집에 들어올 때는 소리 나지 않는 휘파람도 불었다. 여자들의 벌거벗은 듯한 차림보다는 하늘거리는 긴 치마가 좋았고, 민소매의 구릿빛 피부보다는 비취색 스카프 한 장이 목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그런 가을이 다가오려고 했다. 그렇게 뜨겁던 2016년의 여름이 힘을 잃어갈 즈음 두 사람은 두 번째 만남을 약속했다.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이번에는 K가 먼저 연락을 했다. 차마 목소리를 들으며 약속을 정할 용기가 없었던지 문자를 보냈다. "혹시 낮술 좋아하세요?" "그럼요, 그럴 수 없어서 문제죠." 그럴 수 없다는 대답에도 남자는 또 용기를 내 문자를 보냈다. "안 오셔도 돼요. 저는 가끔 혼자 낮술을 해요. 내일 생각 있으면 오세요."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인사동의 어느 남도음식점으로 장소를 정했다. 정말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위안을 하며 남자는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인사동으로 향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콧날이 오뚝한 외국인들과 시끄러운 관광객들이 비 내리는 인사동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전통의 거리가 아닌 술로 적실 거리였다. 꼬막과 파전을 상큼하게 시켜놓고 막걸리를 한잔하는데 큼지막한 우산을 접으며 그녀가 들어왔다. 꽤 찾기가 힘들었다는 표정이다. 미안했다. 굳이 비 오는 날, 강남에서 전통의 거리 인사동까지 오게 했나 싶었다. 게다가 찾기 힘든 골목길 식당이었다. 앉자마자 S는 생긋 웃었다. 남자 K의 미안해 하는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K는 미안한 마음이 들킨 것을 애써 무마하려고 했지만, S는 제법 편안하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K를 배려했다.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이 막걸리를 받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아직 둘은 어색한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오후 3시를 넘긴 가게는 사람이 없었다.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골목길을 바라보며 막걸리가 한 순배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만남으로는 세 번째, 둘이서 따로 만난 것은 두 번째였지만, 남들이 보면 오래된 연인 같아 보였으면 좋겠다고 K는 생각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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