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5

  • 독고탁
  • 입력 : 2017.06.0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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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서다-5] <5편, 낮술>

식당에는 두 명의 중년 여자가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것 말고는, 가끔 오가는 식당 아주머니의 한가로운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삶아 먹을 듯이 뜨겁던 여름이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마지막 여름 비는 골목을 슬프게 적시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때문인지, 낮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진지한 이야기는 없었다. 시시콜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많았다. 막걸리 주전자가 서너 번 비워진 뒤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모든 것이 남자 K의 뇌세포를 흥분시켰다. 술, 담배, 이야기, 여자, 비…….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도 남자는 점점 혼미해져 갔다. 막걸리 잔을 부딪히며 대학시절 술 먹던 이야기를 서로 늘어놓았고, MT를 갔던 이야기를 기억해냈고, 잘 모르는 전공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자의 방심이 컸던 것일까! 여자의 막걸리 잔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초여름 연못가에 앉아 있을 때 소나기가 한두 방울 시작할 때의 파동이었다. 잔잔하지만 곧 있을 큰 소나기를 예고하는 파동. 남자는 심호흡을 하며, 가느다란 눈으로 애써 침착을 유지해 보았다. 그 사람의 눈물은 크고 많았다. 바라만 보던 남자 K가 용기를 냈다. 세상을 들어올릴 만큼 용기가 필요했다. K는 손을 뻗어 턱밑까지 흘러내린 S의 눈물 방울을 훔쳤다. 두꺼운 송판으로 만든 탁자가 원망스러웠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널 수 없는 강 같았다. 한 번 더 손을 뻗어 "울지마요"하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남자는 손가락 끝에 남은 물기를 몰래 입술에 갖다 대보았다.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었다. 흐르는 눈물에 직접 입술을 갔다 댈 수는 없지만, 손끝의 남은 눈물에 뽀뽀를 했다. 짜다. 여자의 눈물 맛은 처음이었다. 정말 짜다. 달콤할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어떻게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또 막걸리를 마셨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막걸리의 시큼함이 짜게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눈물은 그냥 아플 때나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보낼 때나 혼자여서 외롭거나 슬퍼서 불식간에 나오는 정도인 줄 알았다. 그 눈물은 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정말 끈적이면서 짠 이 사람의 눈물 맛은 K를 아프게 해서 K의 눈에서 전염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K는 S를 안아주고 싶었다. 진하고 끈적이면서 짜게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아, 네. 뭐, 미안해요. 갑자기 눈물이 나네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면 안될 것 같았다.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K는 생각했다. 여자의 알 수 없는 감정 상태가 바다만큼 깊고 산만큼 높을 것만 같았다. 좁은 식당은 알 수 없는 비장감이 감돌았다. K는 오랜만에 보는 여자의 눈물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지난여름, 술 취한 K가 침대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을 때, 아내가 "우리는 무슨 힘으로 살아내느냐고?" 묻고는 소리 죽여 흐느끼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귀찮았고, 또 왜 그럴까 하는 짜증이 먼저였는데, 방금 K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풀어헤치듯이 내려뜨린 머리 모양, 짧은 머리를 묶어 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은 마냥 K의 잘못 같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것만 같았다. 아내의 눈물은 귀찮은 것쯤으로 여기던 K는 S의 눈물에 완전히 몰입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시 정색을 하며 먹걸리를 마셨다. 이런저런 모둠전이 식어 있었고, 옆자리 중년의 두 여성이 흘깃 쳐다보며 자리를 떴다. 무슨 속삭임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K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새 둘은 거나해졌다.

그녀의 큼지막한 우산 하나만 받치고 둘은 인사동 골목길을 헤맸다. 보슬비는 조금 더 거세져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 여자는 이제 좀 안정을 찾았는지 소주 한잔을 더하자고 했다. K의 마음도 그랬다. 어떻게든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돼지국밥 집을 발견한 둘은 키득키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둘 다 입맛 촌스럽다는 동의였다. 얼큰한 술국을 절반 넘게 남긴 채 둘은 약속한 대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초저녁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말끔한 양복차림의 40대 아저씨들이 또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다. K는 그 순간만큼은 40대가 아니라고 착각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은데, 사람이 모두 아름다운데, 고민스러운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자신이 40대일 리가 없다'는 우주적인 발상을 했다. 둘은 우산마저 접어 들고는 팔짱을 끼고 뛰기 시작했다. 보금자리를 찾아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 새들처럼,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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