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김옥빈 빛나는 액션 스토리 무리수는 아쉬움

  • 양유창
  • 입력 : 2017.06.0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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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142] 영화는 1인칭 슈팅 게임을 하는 듯한 액션 시퀀스로 시작한다. 건물에 잠입한 킬러는 처음엔 총으로, 나중엔 칼을 들고 건장한 남자들을 하나씩 처리해 간다. "혼자 왔어? 여자가 겁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근육질 남자는 당연히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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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서 카메라는 인물 밖으로 빠져나와 처음으로 3인칭 시점이 된다. 검은색 재킷을 입은 숙희(김옥빈)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수많은 남자를 가볍게 처단하고 마침내 보스의 목을 헬스장의 줄넘기 줄로 감은 뒤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목적을 달성한 숙희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다. 경찰차가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숙희는 오늘만 산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본다. 그 위로 타이틀이 뜬다. '악녀'

8일 개봉한 영화 '악녀'의 매력은 단연 강렬한 액션이다. 칸 영화제에서도 호평받은 액션 장면은 '하드코어 헨리' '킬빌' '블랙레인' 등을 연상시켜 독창성은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파닥거리는 날것으로서 시각적 쾌감이 상당하다. 도입부 1인칭 시점 대학살 액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는 액션, 달리는 차의 보닛 위에서 마을버스 안으로 뛰어드는 액션은 영화의 3대 액션 장면이다.

스턴트맨 출신 정병길 감독이 서울액션스쿨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권귀덕 무술감독과 함께 컴퓨터그래픽 없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낸 이 장면들은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2012)보다 몇 배는 업그레이드됐다.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은 게임 속 전사처럼 벽을 타고, 구르고, 뛰어 내리고, 차 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칼로 찌르고, 도끼로 찍고, 대담하게 총을 쏘는데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본 적 없는 고난도 액션이 총망라됐다.

또 박정훈 촬영감독은 카메라를 부착한 헬멧을 직접 쓰고 스턴트맨 만큼이나 아찔하게 뛰어다닌 끝에 역동적인 화면을 얻었다. 광각렌즈를 적극 활용해 인물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마치 고프로 같은 액션캠 화면을 보는 것처럼 스크린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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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의 스토리는 액션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게임 같은 비현실적인 액션 장면이 옌볜에서 온 조선족과 국정원이 등장하는 복잡한 드라마와 잘 섞이지 않는다. 옌볜 조직 보스 중상(신하균), 국정원 팀장 권숙(김서형), 신분을 속이고 숙희에게 접근하는 현수(성준) 등 주요 인물들이 모두 평면적이어서 활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꽤 길게 이야기를 꼬아놓고는 캐릭터들의 동기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 납득하기 힘든 전개가 많다. 그 결과 영화를 보고 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또 영화 속 여러 설정은 어디서 본 듯한 진부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비밀 기관에서 여성이 킬러로 훈육되고 그에게 다가온 연인이 알고 보니 감시자였다는 설정은 '니키타'(1990), 살인병기로 길러지는 여성들이 단체생활을 한다는 설정은 '네이키드 웨폰'(2002), 신분을 위장하고 숨어 사는 여성은 '팜므 파탈'(2002), 딸이 자라서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킬빌'(2003), 마음을 잡고 살아보려 하는데 자꾸만 일이 꼬이는 과정은 '영웅본색'(1986) 등 클리셰 덩어리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악녀'는 정도가 심하다.

사실 '악녀'처럼 액션으로 승부하는 영화는 액션과 액션 사이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을 정도로만 스토리를 만들어도 될텐데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 차라리 '킬빌'처럼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갔으면 어땠을까.

'악녀'는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액션 장면을 만들어냈고, 또 그 액션을 여성 원톱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다. 김옥빈은 제작 과정의 피 땀 눈물이 눈에 선할 정도로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 유의미함을 맥락없는 드라마로 반감시켜버린 것은 못내 아쉽다.

[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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