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감춘 위험한 그녀 '엘르'

  • 양유창
  • 입력 : 2017.06.16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시네마&-143] 이 영화를 보려면 각오해야 한다. 영화가 어렵거나 잔혹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사고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기에 그녀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감독은 폴 버호벤, 주연은 이자벨 위페르다. '원초적 본능'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 등 인간 본성을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것이 장기인 네덜란드 감독이 프랑스 대표 여배우에게서 '피아니스트'의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위페르는 수많은 영화를 찍었지만 '피아니스트'에서 가장 강렬했다. 제자와 사랑에 빠진 교사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역할이었다. '엘르'는 이토록 범상치 않은 감독과 배우의 사이코드라마적 시선과 사드마조히즘이 만난 결과물이다. 자유분방한 로맨스 '베티 블루 37.2'의 원작을 쓴 필립 지앙의 장편소설 '오…(Oh…)'(2012)를 각색했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단순히 '파격'이라는 단어로는 '엘르'의 미셸(이자벨 위페르) 캐릭터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는 윤리의 담장 위에서 자기만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50대 중년 여성으로 게임회사 대표인 그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커리어우먼이지만 그의 일상은 결핍과 욕망으로 점철돼 있다. 결핍된 것은 감정이어서 그는 늘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전 남편의 새 여자친구, 이웃집 남자의 부인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그는 욕망한다. 친구의 남편을 섹스 파트너로 삼고, 이웃집 유부남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그녀가 감추고 있던 비밀이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영화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미셸이 집 안에서 강간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키마스크를 쓴 괴한이 침입하고 미셸은 저항하지만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건 이후 미셸의 행동이다. 그는 큰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다. 감정의 변화가 없다. 그는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는 회사로 출근해 직원들과 신작 게임 그래픽을 점검한다. 게임 속에는 여성 캐릭터가 괴물에게 강간당하는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미셸은 이미지가 실감나지 않는다며 직원에게 다시 만들 것을 지시한다. 그가 당했던 끔찍한 일이 마치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벌어진 것인 양 그는 폭력에 무감각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셸은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식사하는 도중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놔 모두를 당혹스럽게 한다. 친구들은 경찰에 신고할 것을 종용하지만 미셸은 이를 거절한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네. 분위기가 왜 이래?" 하지만 식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미셸은 강간당했다는 사실보다 괴한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에서 더 불안감을 느낀다. 그는 범인이 먼 곳에 있지 않다고 직감해 주위 남자들을 하나씩 의심해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후 30일 동안 미셸의 행적을 따라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꼭꼭 숨겨둔 과거가 밝혀진다.

도대체 미셸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이 사회 통념상 다른 길을 갈 때 관객은 갈등을 겪으며 자꾸만 거리를 두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그녀'를 뜻하는 '엘르'인 것은 관객이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을 객관화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미셸을 3인칭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되면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영화는 후반부에 미셸의 성장 과정을 암시한다. 그는 거대한 폭력이 낳은 소외된 희생자로 어린 시절부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남들과 다르다는 고통이 쌓이고 쌓여 무감각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하는 지금의 괴물 같은 그를 만들었다. 그는 남성 사회의 폭력성에 길들여져 있으면서도 자신 안의 여성성을 견디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와 폭력의 경계에서 그는 홀로 투쟁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셸의 아들 에피소드는 상징적으로 미셸의 심리를 대변해준다. 아들은 여자친구가 낳은 아이가 흑인임에도 자신의 아이가 분명하다며 감싸고 돈다. 제3자가 보기엔 분명히 이상하지만 그에게는 그게 최선의 삶인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는 커리어우먼이자 폭력의 희생자이며 자유분방하게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미셸은 모든 면에서 극단적이지만,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놓고 보면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단면을 확대해 들여다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 더 처참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강간당한 여성의 사적 복수극이라는 플롯을 갖추고 있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차분하다. 미셸이라는 인물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영화의 분위기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버호벤 감독은 인위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매우 사실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모든 것에 초연한 듯 어떤 신체적·심리적 폭력에도 움츠리지 않는 묘사와 곳곳에 심어 놓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풍자가 영화를 독보적인 작품으로 만든다.

위페르는 미셸이라는 어려운 캐릭터를 맡아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연기를 보여준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동정을 허용하지 않는 무표정이 일품이다. 영화는 작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올해 프랑스 세자르상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5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양유창 편집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