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정의의 힘은 어디까지 그리스 여인들이 던진 물음

  • 김연주
  • 입력 : 2017.06.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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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76]
그리스 여인들 '정의'를 묻다.
이수인 연출이 선 보이는 '안티고네'
산울림 소극장 '헤카베' 앙코르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법이 있었다. 독립된 도시국가(폴리스)가 규정하는 '인간의 법'(노모스)이 있다면 그와 다른 신이 정한 '자연의 법'(피시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양자는 항상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부딪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둘이 부딪칠 때 '정의'가 피시스와 노모스 중 어느 쪽에 속하는가 하는 고전적 논쟁은 그리스 비극의 주요 소재 중 하나였다.

안티고네
▲ 안티고네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이수인 연출이 '그리스의 여인들-안테고네'를 선보인다. 그리스의 여인들 시리즈의 첫 포문을 여는 작품 다음으로는 '트로이의 여인들'이 예정돼 있다. 안티고네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원하지만 친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신탁을 받은 불행한 오이디푸스다. 신탁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두 아들과 두 딸을 낳는다. 안티고네는 셋째 딸로, 이후 눈이 먼 그를 한평생 돌보는 효녀다. 비극은 오이디푸스 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가 떠나고 테바이의 왕권을 두고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전쟁을 벌인다. 둘 다 전쟁 중 전사하고 그 결과 안티고네의 외삼촌인 크레온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크레온은 외부 세력인 아르고스인을 끌어들여 전쟁을 이기려 했던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 하여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고 어기는 자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될 거라는 칙령을 내린다. 연극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안티고네
▲ 안티고네
안티고네는 왕의 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죽은 오빠를 매장한다. 죽은 자에게 그토록 비정할 필요는 없으며, 또 가족으로서 그를 외면하는 것은 신이 말하는 도리(피시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수인 연출은 권력자 크레온이 자가당착에 빠져 끔찍한 비극 앞에 서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인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인륜을 지키려고 하는 안티고네의 숭고한 의지를 부각시킨다.

제목과 다르게 연극의 주된 초점은 크레온에 맞춰져 진행된다. 크레온은 연극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인물이다. 그의 말투는 확고하고 대사는 장황하며 몸짓은 당당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안티고네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옳지 않아. 아닌 건 아닌 거야" "약삭빠른 거랑 현명한 건 달라"라는 단답형으로 짧게 외칠 뿐이다. 긴 대사 대신 그녀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종종 안티고네의 텍스트를 법과 정의의 가능성으로 읽을 때 크레온은 법을, 안티고네는 정의를 대변한다고 이해되고는 한다. 하지만 이수인 연출은 정의의 가장 큰 적은 '악법'이 아닌 바로 '의심 없는 자기 확신'이라 말하는 듯하다. 크레온은 자신의 행동에 당당하다. 자신이 '정의'라는 데 믿어 의심치 않는다. 크레온이 그토록 오만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안티고네뿐만 아니라 하이몬 그리고 아내조차 그의 오류를 말하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크레온은 법에 따라 안티고네를 석실에 가두라 명한다. 안티고네는 석실에서 자살한다. 그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곧바로 그녀를 따라 자살한다. 하이몬의 어머니이자 크레온의 아내인 에우리디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못 이기고 목숨을 끊는다. 피를 본 뒤에야 크레온은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안티고네는 법(노모스)보다 형제의 정, 인륜(피시스)을 주창한다. 법(노모스)이 언제나 정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말한다. 안티고네는 법이라는 이념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며 크레온은 법 안에서 정의를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법에 힘을 빌려 쉽게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법 너머에 있는 정의를 힘들여 상상해보는 것이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임을 설파한다.

안티고네가 법(노모스)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인륜(피시스)을 주장한다면 헤카베는 법(노모스)이 제대로 작동하면 인륜(피시스)과 대립하지 않고 합치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녀는 법의 공정함의 회복을 울부짖는다.

헤카베
▲ 헤카베
헤카베는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피해자다. 헤카베는 트로이의 여왕으로, 헥토르와 카산드라의 어머니기도 하다. 그는 십여 명에 이르는 아들을 잃고 남은 유일한 막내아들 폴리도로스를 트라키아 왕 폴리메스토르에게 피난 보내 양육을 부탁한다. 그런데 폴리메스토르는 그녀의 부탁을 저버리고 트로이의 황금을 탐내 폴리도로스를 죽이고 토막 내 강에 던져버린다.

이 사건으로 둘은 법정에 서게 된다. 한때 트로이의 여왕이었지만 전쟁포로로 전락한 헤카베와 트로이의 동맹국에서 그리스의 동맹국으로 태세를 재빠르게 전환한 트라키아의 왕 폴리메스토르가 재판관인 아가멤논 왕 앞에서 각각 자신의 무고함을 읍소한다. 헤카베에게 불리한 재판임이 자명하다. 헤카베는 그리스의 총사령관이자 재판관인 아가멤논에게 자신의 아들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부탁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와 다른 그리스 장군들은 아가멤논에게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을 압박한다. 망국의 왕비이자 노예인 헤카베의 편을 들기보다는 동맹국 왕인 폴리메스토르의 편을 들어주는 게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이라고 속삭인다.

창작집단 LAS의 이기쁨 연출은 헤카베란 한 여인에게 부과되는 연이은 불행에 초점을 맞춘다.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는 소극장에는 넓은 나무 판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헤카베와 여인들은 플라멩코의 격렬한 춤사위로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다. 그들이 거칠게 발을 구를 때면 소극장 전체가 진동한다. 우리가 종종 접할 수 있었던 화려한 탭댄스가 아닌 다운 바운스의 투박한 탭댄스다. 땅을 박차고 오르는 게 아니라 땅과 부딪치며 그 울림을 발에 그대로 여운으로 남겨둔다. 헤카베를 맡은 곽지숙의 연기가 일품이다. 아이와 나라를 잃은 망국의 왕비이자 어미의 슬픔을 극단으로 몰아 분노로 터트린다. 슬픔에 어쩔 줄 몰라 허공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이 옷을 찢을 듯이 부여잡을 때면 분노가 된다. 폴리메스토르를 맡은 윤성원의 맛깔나는 연기 역시 관객이 헤카베에 이입하여 함께 분노하도록 돕는다. 교활함과 간사함을 막힘없이 유려한 대사를 통해 전달한다.

결국 헤카베와 그녀의 슬픔에 동감하는 트로이의 여인들은 스스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법이 피해자인 자신들을 돌보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헤카베는 아가멤논의 발치에 매달려 몇 번이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아가멤논은 그녀에게 동의하는 듯하지만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한다. 인간의 법(노모스)이 인간의 이해관계와 얽혀 공정함을 잃을 때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사적 복수다. 법이 공정하지 않을 때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헤카베와 여인들은 발을 세차게 구르며 폴리메스토르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그의 눈을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를 살해한다.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헤카베가 복수의 춤을 추고 모든 등장인물이 손으로 합판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춘다. 그 묵직한 소리와 진동이 긴 잔상을 남긴다.

연극 '헤카베'는 산울림극장에서 18일까지, 연극 '안티고네'는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25일까지.

[김연주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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