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6

  • 독고탁
  • 입력 : 2017.06.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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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6] <6편, 노래방>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찾은 보금자리는 골목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노랗고, 발갛고, 반짝이면서 노래방이라는 글자를 빗속에서 돋보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둘은 아까 돼지국밥집에서 약속한 대로 노래방을 들어갔다. 술기운이 돌면서 노래를 하고 싶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제안했고, 금세 의기투합을 했던 것이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남자는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했다. 허름한 건물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음산했다. 희미한 계단을 내려가면서 남자 K는 계단 끝의 문을 열었을 때 환상의 모험세계가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뜨악한 상상을 해보았다. 파란 바다 위를 가르는 요트를 타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금발의 미녀와 함께 멀리 보이는 미지의 섬에 다다르기 직전 남자가 여자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까지의 모험의 연속이 끝나고 낙원 같은 섬에서 알콩달콩 살아갈 꿈에 부풀어 있는 두 남녀 주인공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동화 같은 환상의 세계는 노래방 문을 열면서 사라졌다. 입술을 발갛게 바른 아주머니가 이른 손님이 반가웠는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안쪽 방으로 둘을 안내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모퉁이를 돌아 들어간 7번 방은 두 사람이 실컷 노래 부르며 즐기기에 충분히 아늑했다. 캔 맥주와 새우깡 접시를 밀어 놓고 재미있게 놀라며 나가는 나이 많은 아주머니는 무슨 낌새를 느낀 듯 씨익 웃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아무리 술을 먹었지만 시공간이 주는 낯선 풍경은 두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6시경 허름한 지하 노래방에서 두 번 째 만난 40대의 두 남녀!

여자 S는 괜히 노래 제목이 가득한 낡은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고, 남자 K는 맥주를 따서는 여자 앞에 밀어 주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도 따라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같이 피우는 담배는 다시 찾아온 잠깐의 어색함을 사라지게 하기에 좋았다. "노래 좋아하세요?" "네, 잘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노래방 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먼저, 하세요…." "네…." 남자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불렀고, 여자는 이어서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불렀다. 두 번째 남자는 또 다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불렀고, 여자는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불렀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서른이 넘고 마흔을 지나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남자 K는 '갖고 싶지 않고, 꼭 숨겨둔, 그냥 사랑하고 싶은 그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눈물도 흐르고, 가슴도 저리겠지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서로를 만나 사랑하고 다시 멀어지'는 것은 늘 꿈꾸던 기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세 번째 노래,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불렀다. 가끔씩 우울한 눈빛을 보이던 S를 떠올리며 K는 최선을 다해 불렀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면, 여자는 자신의 상태를 위로하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지금 이 순간에 어울리는 노래를 고민해서 골랐다면, 여자는 이별을 노래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응시하며 빠르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면, 여자는 그 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노래방 화면만 응시했다. 남자가 여자의 작은 일까지 알고 싶다며 무척이나 애쓰며 세 번째 노래를 마치자, 여자 S가 세 번째 곡을 불렀다.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남자 K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그녀가 울던 날 남자 K는 온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K는 노래를 마친 S를 뒤에서 꼬옥 안아 주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품에 들어올 정도로 그녀는 작았지만 따뜻했다. 여자의 눈빛이 슬퍼 보였지만, 물기 없는 호기심에 맑은 눈망울이 예뻤다. 그녀의 입술에 남자는 입술을 포갰다. 매우 예의 있게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입술과 입술의 접촉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노래방 7번 방안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40대의 키스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입술의 감촉만 느끼고 떨어졌다. 그리고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꼬옥 끌어안았다. 심장이 흐느낄 정도로 슬프고, 뿌듯하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는 쓰다듬었다. K는 알 것 같았다. 여자와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반면 여자 S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있을 수 있는 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두 사람의 마음의 대화만이 가득했던 노래방은 남자의 네 번째 노래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내친김에 K는 이승환의 '좋은 날'을 불렀다. 여자는 낡은 노래방 소파에 앉아 남자를 감상하고 있었다. 떨렸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남자는 들떠 있었다. 입술이 멀어졌을 때 그녀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남자는 여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20대의 연인처럼, 택시 안 내내 둘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살짝 여자가 머리를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택시가 터널에 들어서자 남자는 터널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이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세상과 단절된 진공 상태에서 끝없이 날아가고 싶었다. 택시가 우주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서 둘은 다시 한 번 입술만의 뽀뽀를 했다. 그리고 여자는 뛰다시피 하며 높다란 주상복합 아파트로 사라졌다. 이른 오후에 시작한 만남은 자정이 돼서야 끝났다. K는 허전했다. 허기를 느끼며 돌아오는 택시가 반포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칠흑 같은 한강이 저 멀리 있었고, 강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커다란 짐승이 그곳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을 것 같았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상이라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무서운 짐승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 속에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달도 없고, 강물은 외로울 사이도 없이 어둡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자는 창문을 열었다.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반지르르한 이마를 지나며 두려움을 씻어 주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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