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7

  • 독고탁
  • 입력 : 2017.07.0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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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서다-7] <7편, 두려움과 용기>

둘은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다. 노래방에서의 키스는 진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깊이 파문을 그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그 사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서로 연락하지 않는 동안 남자는 자신을 유난히 독하게 돌아봤다. S는 그녀만의 명쾌한 성격으로 앞 일만 생각했다. 뒤돌아 본다는 것은 자신을 처량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조금씩 어두운 세상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 사람은 서로를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상황, 다른 생각, 다른 목표가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둘은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먼저 연락했으면 하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몰래 사랑하다 들킨 연인처럼 꼼짝 못하고 그대로 굳은 동상 같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 시간 동안 남자는 자주 술을 먹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골목길 허공 위로 자신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직 초가을이었지만 하얀 입김이 불을 뿜듯이 검정 하늘로 길게 새나갔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지만, 아무것도 바랄 것 없는 세상이라고 자책했다. 고개를 털썩 땅으로 향해 보면 앞이 돌부리에 긁혀 낡아진 구두가 순서를 바꿔가며 힘겹게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몸과 마음이 한데 얽혀 혼란하게 화를 내는가 하면, 한숨을 내쉬며 팔을 휘이 젓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그대로 서있기도 했다. 그 시간,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골목길은 오로지 남자만을 오롯이 안아주고 있었다. K는 결혼 후 20여 년 동안 지금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이 힘들고 길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럴수록 술을 먹었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급급했다. 현실에 집중하고 있다는 듯이 행세함으로써 사람들은 K가 이번 가을은 순탄하게 보내나 보다 했다. 그렇게 K는 2016년의 가을을 오로지 혼자 보내고 있었다. 아내도, 아이들도, 친구들도, 회사 동료들도 모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높아져만 가는 하늘을 가끔 쳐다보며 또 하나의 가을을 보내고 있었지만 K는 달랐다. 아무도 모르게 범죄를 준비하는 살인자의 치밀한 계획을 꿈꿨다.

K는 두려웠다. 국제통화기금이라는 유령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 날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 다음 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한 번도 다른 여자를 마음에 넣어 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술기운을 핑계 삼아 비싼 돈이 아깝지 않다는 듯이 여자의 화장 냄새에 환장한 적은 있었다. 그런 날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K는 수치심과 미안함과 후회를 가득 안고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빠득빠득 샤워를 하고 아내를 안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결혼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뻔뻔함과 무감각으로 변했다. 열심히 사는 만큼 마음의 가책은 줄어 들었고, 사람에 대한 예의와 도리가 부족해도 사회적 피곤 때문에 이해되리라 아내에게 기대했다. K는 그나마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미안해 했다. 아이들에게 주는 아버지로서 교훈과 세상에 대한 지혜는 늘 어려웠다. 이따금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는 기색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곤 했다. 무뚝뚝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행히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어느 정도는 표현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K는 세상 살 맛 난다고 자위했다.

그런 K가 심한 가을앓이에 빠진 것이다. 말은 살찌는지 몰라도 K는 밥맛이 없었다. 푸석푸석한 모래를 입에 넣은 듯 통 먹지를 못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밀려왔다.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가을을 혼자 보내고 있었다. 연락해서도 안되고, 연락하면 그 다음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점점 아내와 대화가 없어졌고, 아이들에게는 무심한 듯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은 아니지만 그 상태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K는 느끼고 있었다. K는 교회에서 회개를 했다. 이웃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더 깊이 회개를 했다. 그리고 조금씩 입맛을 회복해 나갔다. 가을이 완연해지면서 남자는 붉게 타는 노을만큼 황혼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기로 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을이 한창이었다. 그날도 오랜만에 가을 공기가 좋아 야외 테라스가 있는 호프집에서 K는 직원들과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치맥. 참 맛 없는 앙상블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치맥에 열광했다. 유느님과 연아느님에 이어 치느님은 모두에게 인기였다. K는 늘 치킨의 날개 하나만 먹고 더는 치킨을 먹지 않았다. 맥주 한 모금에 새우깡이나 땅콩을 입에 넣는 것을 좋아했다.

휴대폰에 문자가 찍힌 것은 10시가 금방 넘었을 때였다. "아...지금 올 수 있어요?" 남자는 가을이 무르익는 동안 고민했던 지난날의 각오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쏜살같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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