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그린 '삶의 의지' 스캔들 이후 달라진 영화

  • 양유창
  • 입력 : 2017.07.07 15: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시네마&-146]

(이 글에는 후반부 스토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너네들이 더러운 짓 한 것 모를 줄 알아?"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의 아내 해주(조윤희)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한다. 그는 회사로 찾아와 직원 아름(김민희)의 뺨을 때린다. 오늘 처음 출근한 아름은 영문을 모른다. 이후 삼자대면한 상황에서 봉완은 아름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해주는 믿지 않고 끝까지 아름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한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해주가 돌아간 뒤 봉완과 아름은 술을 마신다. 아름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봉완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 내일도 출근하라고 달랜다. 그때 연락이 두절됐던 봉완의 불륜녀 창숙(김새벽)이 불쑥 나타난다. 두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함께 일하기로 약속한다. 창숙이 업무에 복귀하면 아름은 해고돼야 하는 상황. 화가 난 아름은 소리친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면서요?"

지난 6일 개봉한 영화 '그 후'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좌충우돌 코미디와 그 후일담으로 구성돼 있다. 봉완은 변명이 일상인 비겁한 남자, 해주는 의심 많은 막무가내형, 창숙은 로맨스를 바라지만 계산적인 여자, 아름은 사건의 한복판에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관찰자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건의 퍼즐을 흐트러뜨린다. 창숙과 아름은 과거였다가 현재가 되기를 반복한다. 장난스러운 시제의 퍼즐 맞추기, 세 여자 사이의 오해와 잔꾀, 소주 한잔을 마시고 주고받는 인생에 관한 대화가 흑백 화면에 유머러스한 단편소설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개인적인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사회적 지탄에 괴로워하는 김민희를 위로하는 영화였다면, '그 후'는 아내와 갈등을 겪는 본인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부인하지만 자신의 스캔들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택한 듯하다. 우디 앨런, 프랑수아 트뤼포 등 예술가들 중에는 자신의 사생활에 쏟아진 관심을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스캔들 이후 홍상수 영화가 꽤 많이 달라졌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과거 홍상수 영화는 젠체하는 지식인들의 위선을 비웃고 풍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수, 감독, 시인 등의 직업을 가진 남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자들은 '진짜 저를 아세요?'라고 말하며 애를 태운다. 당장 스캔들 이전 김민희가 출연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도 어떻게든 여자를 꼬셔보려는 영화감독의 이야기였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자기만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 진실이 하나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그 후'는 이런 표피적인 인간 관계를 벗어나려 한다. 전자에서 영희(김민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위로받고 불륜남인 영화감독과 대면한 자리에선 기어이 진심을 털어놓는다. '그 후'의 봉완은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아름과 창숙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면초가에 처하자 목놓아 울어버린다. 그리고는 한참 후 그날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갈등을 회피하려 한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두 영화 모두 기존 홍상수 영화처럼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재구성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홍상수식 남녀는 여전히 우스꽝스럽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그 시간의 흐름이 누군가에게는 시련이고 누군가에게는 망각일지언정 되돌아가지 않고 놓아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 후'에는 봉완과 아름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믿음과 실재에 관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봉완은 진실이 어딘가에 실재한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아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보다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홍상수 영화의 변화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이 봉완의 말처럼 '실재라는 느낌'을 추적하는 과정이었다면, 최근 영화들은 아름의 말처럼 믿음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아름은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밤 택시 안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리 없을 텐데도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는 잠에서 깨어나 모래사장을 뚜벅뚜벅 걷는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사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영희가 걷는다는 의지만 강조된다. '그 후'도 비슷하다. 하룻밤 소동이 끝난 뒤 영화는 후반부에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후일담을 삽입한다. 시간이 지난 후 옛 기억은 흐릿하고 모든 것이 정리돼 있다. 봉완은 "딸 때문에 내 인생은 포기했어"라고 말하며 아내와 살고 있는 스스로를 자조한다. 아름은 사무실을 나와 눈이 쌓인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두 영화의 몽환적인 엔딩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진실이라는 실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갖고 있는 믿음만이 소중하다. 그러니까 홍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건 현재의 사랑일 뿐이니 주위 반응에 신경 쓰지 말자는 외침이 스크린 밖으로 들리는 듯하다. 이 영화들을 그가 늘어놓은 변명이라고 해석하든 말든 자기 확신에 찬 그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스캔들 이후 달라졌다. 일상 속에서 인간관계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캐치하는 방식이나 줌의 사용 등 스타일은 그대로지만 등장 인물을 더 이상 시간이라는 미로에 가두지 않고 삶의 의지로 빠져나오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대중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 한 예술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는지 모른다. "왜 사세요?" 아름이 밥을 먹는 일상적인 행위 도중 감독의 페르소나인 봉완을 향해 불쑥 던진 이 질문은 그래서 '자조'가 아니라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양유창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