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8

  • 독고탁
  • 입력 : 2017.07.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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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8] <8편, 불혹과 미혹 사이>

K는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강남역 근처의 술집. 올 수 있냐는 그녀 S의 문자에 "어디인가요? 아, 거기요. 알아요. 금방 갈게요." 통화를 마친 뒤였다. 술에 취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와 왜 '왔으면'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노래방에서의 만남 이후로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굳게 다짐했던 불혹은 간데 없고, 미혹의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닐 거야, 그러면 안돼' 하며 자신을 억눌렀던 K의 이중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택시기사에게 서둘러 달라고 두 차례 재촉하고 K는 뒷좌석에 기댄 채 가슴을 진정시켰다. 창문을 살짝 내렸다. 남산 순환길로 들어선 택시는 가을 미풍을 맞으며 휘어진 길을 미끄러져 갔다. 45세. 딱 인생 한가운데의 꼭지점 같은 나이. 가장 왕성하게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을 그들. 그중에 K가 있었고, 오늘 K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권투선수 최용수가 그렇고, 예능고수 유재석이 그렇고, 빼어난 미남 장동건이 그렇고, 신세대 바람을 몰고 온 서태지가 그렇고, 10대 걸그룹을 이끄는 박진영이 그렇고, 윤도현 고소영 심은하가 그렇다. 91학번이 그렇고, 삼성에 다니는 부장 친구가 그렇고, 몇몇 아는 기자가 그렇고, 얼마 전에 창업한 치킨집 사장이 그렇다. 동대문에서 새벽 장사를 하는 영옥이가 그렇다. 조기 축구 나오는 마을금고 지점장이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그들 모두는 불혹과 미혹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거라고 K는 가끔 생각했다. K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쟁쟁한 사람들이 같은 세대로서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겪었을 시기이고, 또 누군가는 겪게 될 시기인데 K는 마흔 중반의 자신을 늘 애처롭다고 여겼다. 20대에 못다한 성장을 부여잡고 20년을 살았으니 아직 성장 중이기에 오늘이 늘 막연했다.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 가난과 고난의 세월을 버티며 삼시 세끼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에 목숨을 걸었던 부모 세대와 달리 문화 소비와 국제적 감각을 키우게 된 자식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종 혹은 반항이라는 양극단 밖에 없었다. 이제 좀 벗어나 볼까 하는 마음이 늘 마음 언저리에만 있고 아무것도 못했던 그들이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얼마 전, 그녀를 바래주고 건너왔던 한강을 K는 오늘 반대로 건너가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건너는 한강. 그때는 무섭고 두렵게 웅크리고 있던 강물이 오늘은 다리를 따라 설치해 놓은 조명 때문에 반짝거리며 예쁘게 느껴졌다. 조용하지만 흥분이 시작되는 오페라의 서막 같았다.

K가 어색하게 술집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S는 디귿자의 넓은 가죽 소파에 혼자 앉아 싱글 몰트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다. 방금까지 누군가 함께 술을 마셨다는 듯이 잔들이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왔어요? 안 올 줄 알았는데……" 눈빛과 발음은 약간 흐릿했지만, 여자는 분명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어요? 많이 드셨나 봅니다." 남자는 처음 만나는 여자 대하듯 무뚝뚝한 예의를 차리며, 한껏 부푼 마음으로 서둘러 온 기색을 감추려고 했다. 약간은 어두운, 소수를 위한 분위기의 술집이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그녀와 묘하게 어울렸다. "일은 잘 되시죠?" 남자의 의례적인 질문을 자르듯 "왜 연락 안 했어요?" 하고 여자가 세게 나왔다. 참고 참은 모든 시간이 불필요했다는 듯이 남자는 "미안해요. 연락하면 당신이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자신이 없었어요" 하고 눌러 왔던 진심을 털어 왔다. "연락 기다렸는데……너무 용기 없는 거 아닌가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따지는 것이었지만, 말하는 동안의 그녀의 행동은 애교스러웠다. 길쭉하고 앙증맞은 잔을 들어 부딪히고 단숨에 잔을 비운 남자가 긴장을 풀며 "맞아요. 보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습니다." "너무 진지해 지네요. 그런 의도는 아닌데. 그냥 연락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여자는 남자가 드라마처럼 이야기 하는 것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 그러게요. 편하게 연락도 하고 안부할 걸 그랬군요." K는 순간 한 발 물러서며 잔을 또 부딪혔다. 마침 술집 음악이 팝송에서 재즈로 바뀌며, 끈끈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둘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노래방에서의 여운을 되새기며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남자가 여자를 조금씩 알아가고 싶다는 듯이 "대표님은 주말에 주로 뭐 하세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아이랑 주로 보내려고 하죠. 사무실에 나올 때가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요." "아이가 딸이라고 했죠? 6학년이면 다 컸네요." "또래보다 특이해요, 말하는 게. 너무 어른 같이 말해서 오히려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니까요. 하하." 딸 이야기가 나오자 S는 언제 술이 과했냐는 듯이 또릿또릿하게 현실을 직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운동을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이어서 학교에서는 따르는 아이들이 많다고도 했고, 본인이 좋아하는 거라면 시키지 않아도 잘 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다고도 했다. 남자는 그럴 때마다 여자에게 맞장구를 쳤다. "와, 초등학생 같지 않은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S가 계속 딸에 대해 말을 이어가도록 도와줬다. 그러면 여자는 그 어떤 주제보다 진지하게 '이제는 말하고 싶었다'는 듯이 남자에게 길게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그런 말을 들어주는 남자는 속으로 뿌듯해 했다. '이 여자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었구나' 생각하며. 남자의 속마음을 떠나서 여자는 정말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있는 소파 건너편의 K가 고마웠다. 뭔가 속 깊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둘은 생각했고, 서로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생각의 시계가 자석처럼 가까워지자 술집의 시계는 자정이 가까웠음을 알려 주었다. 여자가 비틀거렸기에 남자는 여자의 팔짱을 끼고 술집에서 나왔다. 둘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듯이 한참을 술집 앞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운 덕분에 둘은 더 혼미해지는 정신을 풀어 놓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여자의 집이 가까웠기에 둘은 조금 걷기로 했다. 팔짱을 끼는가 하면 손을 잡았고, 가끔 어깨도 감쌌다. 가을 바람이 이렇게 상쾌한 적이 있었던가 속으로 생각하며, 남자는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를 들여 보내고 다시 한강을 건널 때 목도할 두려운 강물이 떠올랐기 때문에.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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