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뻥 뚫리는 나무냄새···산 아래 도시는 아득하기만 했다

  • 허연
  • 입력 : 2017.07.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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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도의 한 장면. 왼쪽부터 치에코와 나에코
▲ 영화 고도의 한 장면. 왼쪽부터 치에코와 나에코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33] 소설 '고도'에 등장하는 교토의 명소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중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으면서도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기타야마(北山)의 삼나무 숲이다. 기타야마는 긴카쿠지(金閣寺)가 위치해 있는 교토 북부 기타구에 있는 마을이다.

삼나무는 '설국'에서도 매우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설국의 삼나무가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쓰였다면, '고도'에 등장하는 삼나무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 주제를 암시해주는 결정적 모티프다.

'고도'에서 삼나무 숲은 하나의 환상적인 공간이자 소설의 시작과 끝이다. 갓난아기 때 헤어진 쌍둥이 자매 치에코와 나에코가 태어난 곳이 바로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이다. 따라서 삼나무 숲은 두 자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다. 소설 속에서 치에코와 나에코가 서로 자매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소도 삼나무 숲이다. 소설 마지막에 나에코가 같이 살자는 치에코의 제의를 뿌리치고 돌아가는 곳도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이다.

기타야마 삼나무 숲은 이처럼 소설 곳곳에 중요한 암시를 던져준다. 소설 초반에 보면 자신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치에코가 무엇이 끌린 듯 삼나무 숲에 가고 싶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치에코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토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
▲ 교토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

"기타야마의 삼나무가 보고 싶어. 다카오에서 가까워. 쭉쭉 뻗은 기타야마 삼나무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후련해지거든, 삼나무를 보러가지 않을래?"

그로부터 얼마 후 치에코는 자신이 쌍둥이였다는 출생의 비밀과, 자신의 생부가 기타야마에서 삼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중 추락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치에코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마을에 가보고 싶은 것도 아름다운 삼나무 숲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혼이 불러서 그랬던 것일지도 몰라."

기타야마의 삼나무 숲은 '설국'에서 에치코유자와가 그랬듯 하나의 거대한 '환상 공간'이다. 도시와는 떨어진 원초적이며 영적인 공간인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장면에도 삼나무 숲이 반드시 등장한다. 치에코가 삼나무 숲에서 나에코와 함께 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그 순간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익숙한 나에코가 겁에 질린 치에코를 끌어안아준다. 그 장면을 야스나리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산속에 내리는 소나기는 손끝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 안아주고 있는 나에코의 온기가 치에코의 몸에 스며들어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고 따뜻했다. 치에코는 잠시 행복감에 잠겨있다가 거듭해서 '나에코상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어머니 뱃속에서도 나에코상에게 이렇게 안겨 있었을까요?…'"

두 자매가 빗속에서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은 흡사 어머니 뱃속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삼나무 숲은 소설에서 두 주인공이 근원을 발견하는 장소이자 더 나아가 일본미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야스나리는 서양문명과 도시화에 무너지고 있는 일본의 정통미와 생명력를 다시 살려내고 싶어했다. 소설의 핵심 배경을 도심과 떨어진 숲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타야마는 교토 중심부에서 JR버스를 이용해서 가면 좋다. 버스를 타고 기타야마 그린가든 앞에서 내리면 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긴카쿠지에서부터 교토의 거리와 숲을 즐기면서 걸어가는 것도 좋다. 인공적으로 조림한 국가 산림공원이라 성인 300엔 정도의 입장료가 있다.

입구를 지나 걸어 올라가면 진경이 펼쳐진다. 13세기부터 일본 귀족들이 정원수를 만들기 위해 조성된 삼나무 숲은 너무나 정갈하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수십만 그루의 삼나무 군락은 신비스러울 정도다. 인공적으로 조림을 해서 삼나무들의 크기가 거의 균일한 것이 오히려 신령스러움을 더한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이 얹혀 있는 모양새가 사람 같기도 하고 무슨 기념 조형물 같기도 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나무 냄새에 취하면 산 아래 도시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소설 '고도'는 한국에서 인기가 없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너무나 일본적이다. 야스나리가 작심하고 일본미에 바치는 기획소설을 쓴 것 같다. 그래도 이 소설은 실패하진 않았다. 읽는 내내 교토에 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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