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눈물도 붉은 색" ... '이즈의 무희'엔 절대미가있었다

  • 허연
  • 입력 : 2017.07.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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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한 영화
▲ 1974년 야마구치 모모에가 주연한 영화 '이즈의 무희' 포스터.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34]
소나기 지나간 고개의 찻집에
맑은 동반자 여행의 하늘
귀여운 무희 북을 들고
걸어 가는 길에 흰 꽃

오늘 잠자리는 온천의 여관인가?
하얀 욕조에 물드는 살갗
귀여운 무희 연회석에 둘러싸여
샤미센과 북, 미닫이 창문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리지만
검은 머리 엷은 화장
귀여운 무희가 고개를 갸웃
웃는 눈언저리의 부끄러움

배가 떠나가는 시모다의 바닷가를
또 만날 날은 올까
귀여운 무희 가볍게 흔드는 손가락에
흘리는 눈물도 붉은색
- 영화 <이즈의 무희> 주제가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라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가 있다. 나는 그녀를 흐릿한 인터넷 화면에서 처음 봤다. 그녀가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은 은퇴 선언 직후 부도칸에서 가진 1980년 마지막 공연 장면이었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21살짜리 대형 가수의 은퇴 선언에 일본은 떠들썩했다.

그녀의 은퇴 공연은 눈물바다였다. 공연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함께 출연한 동료 가수들도 공연 내내 눈물을 닦았다. 그만큼 그녀의 은퇴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계에 엄청난 상실감을 안겨줬다.

마지막 공연 장면을 보던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21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녀의 처연한 눈빛이었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어떤 초월자의 눈빛 같았다.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안녕의 저편'(さよならの向う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맺으며 "제멋대로인 절 용서하세요. 행복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무대를 영영 떠났다. 그가 은퇴를 선언한 건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미우라 도모카즈와의 결혼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14살의 나이에 연예인 발굴 프로그램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그야말로 대형신인이었다. 우수어린 한을 담은 허스키 목소리, 나쁜 소년 같은 중성적 매력, 화려하면서도 슬픈 외모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제한한 한국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도였지만 중국이나 대만, 홍콩에서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매염방이나 장국영은 그녀의 광팬이었고, 그녀의 노래를 여러 곡 번안해서 불렀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나를 더 극적으로 환기시킨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가 한국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일본열도를 뒤흔든 1세대 대형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그랬듯 2세대 여왕이었던 그녀도 한국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모모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가정에 불성실한 한국계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소녀가장이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아 그랬구나! 이제 그녀의 눈빛이 이해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내던지고 완벽한 가정을 꾸리는데 집착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야마구치 모모에는 가수뿐만이 아니라 영화배우로도 크게 성공한다. 그녀의 출세작이 바로 1974년 니시카와 가츠미(西河克己) 감독이 연출한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가오루 역을 열연한 그녀는 스크린 스타 반열에까지 오른다. 훗날 남편이 된 기무라 도모카즈와는 이 영화에서 함께 주연을 맡으며 교제를 시작했다.

영화에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부르는 주제가가 흐른다. 앞부분에 가사를 소개한 바로 그 노래다. 노래는 야마구치의 독특한 허스키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이쿠의 미학을 연상케 하는 가사도 좋았다.

"시모다의 바닷가를 또 만날 날은 올까 / 귀여운 무희 가볍게 흔드는 손가락에 / 흘리는 눈물도 붉은색"이라는 대목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음색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듯한 어떤 절대미가 느껴졌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출세작인 '이즈의 무희'는 '설국'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야마구치 모모에 이야기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설국'에서는 늘 첫 문장이 화제가 됐지만, '이즈의 무희'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배에는 생선과 바다의 냄새가 물씬거렸다. 어둠 속에서 소년의 체온이 느껴지며 나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온통 맑은 물로 변했고, 물이 주르르 흐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듯 달콤한 쾌감이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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