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9

  • 독고탁
  • 입력 : 2017.08.0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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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9] <9편, 사귈까요?>

저 멀리, 희미하게 위용을 뽐내 듯 그녀의 집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귈까요?" K는 있는 힘을 다해 개미 목소리로 말했다. 걸어 오는 내내 꾹꾹 눌러 망설이다, 쉬고 있던 화산에서 몇 만 년 속에서 끓던 용암이 분출하듯이, 진심을 다해 뱉은 말이었다. 어색했다. 말을 해놓고는 그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분명하게 남자의 말을 들었지만,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담담하게 여자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걷는 데 집중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걸어 오는 동안 깰 듯 말 듯한 술기운이 싹 가신 기분을 느꼈다. 남자가 감정에 치우쳐 있었다면, 여자는 현실을 직시하는 표정이었다. "잘 가요."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아직 한참이나 남은 집 쪽으로 뛰어갔다. 갑자기였다. 여자의 알지 못할 태도는 남자를 그 자리에 서 있게 만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대답을 못 들은 아쉬움보다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속에 있던 뜨거운 용암을 꺼내 식히려고 하다 여자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곱씹었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남자는 다시 택시를 탔다. 핸드폰에 표시된 시계는 새벽 1시를 넘기고 있었다. 3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계절이 바뀐 한 달 만에, 허겁지겁 달려와서 만나고, 사귀자는 말을 꺼냈다가 당혹스럽게 헤어졌다. K는 택시 안에서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사귀자는 말은 어떤 진심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남자는 무조건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든지 간에 진심이었을 거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사귀자는 말은 함부로 건넬 말이 아니었다. 가정이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지금까지 평범하게 결혼생활을 이어 온 중년의 남녀가 사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깨 버리는 일과 다름없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환경은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K는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면 지금의 일상에 대한 강박관념과 지친 하루를 탈출하고 싶은 대안으로서 누군가를 의지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하지만, 그 모든 머릿속의 정리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K가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그 시각, S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남자들은 참 쉬운 동물이라고. 여자의 호감을 남자들은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K의 사귀자는 말이 참 장난스럽다고. S는 고층을 향해 고속으로 내닫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생각했다. 남자가 "우리 사귈까요?"라고 할 때 괴롭게 가쁜 숨을 토해 내듯 힘들어하는 모습을. 무엇보다도 그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오늘 이후 남자는 자신을 향해 뜨거운 용암처럼 다가올 거라고. 그 다음 일이 걱정이 될 무렵, '잘 자요' 하며 카톡이 울렸다. K였다. S는 K가 집요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자위가 불쑥불쑥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강을 건너던 K는 마지막 예의를 다해 '잘 자요' 라고 카톡을 보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잠시 접어두고 한강을 응시했다. 다리 위에서는 무슨 일인지 붉은 불빛이 어지럽게 반짝이고 있었고, 택시는 다리 한가운데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하고 K는 엉덩이를 들어 잠깐 정면 유리창 너머를 쳐다보고는 다시 강물로 시선을 돌렸다. 건너갈 때의 예쁘다고 생각했던 강물은 예의 상상했던 대로 남자를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그 물속으로 던지고 싶었다. 이기적이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강물이 삼켜 버렸으면 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도, 방금 헤어진 여자에게도 남자는 미안했다. 또한, 둘 다 가지고 싶어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이기적이고 이중적이었기 때문에 저기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강물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다리 위에는 세 대의 차량이 난간 쪽으로 옮겨진 채 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마를 입은 여자가 보도 블록 턱에 기대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서너 명의 남자들이 모여 서서 흥정을 하듯 싸우고 있었다. 흩어진 차량들의 파편을 밟고 지나가면서 택시는 바지락 소리를 냈다. 추돌 사고가 난 지점을 통과하자 다리에서 내려온 택시는 쏜살같이 강변북로를 달렸다.

남자는 S를 만나는 동안은 없어졌으면 하고 무시했던 전화기를 확인했다. 세 통의 부재 중 전화가 있었고, 두 번의 문자가 있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무슨 문자인지 남자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므로 다시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K의 아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오뉴월의 서리 같았다. 남자는 20여 년 동안 이런 경우를 회피하는 경험을 잔뜩 쌓아 오고 있었다. "미안해, 늦어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중요한 약속이라 맥주 한잔 더 하느라고." 평소에는 힘들다는 인상을 쓸 뿐 한마디 말도 없이 곧 바로 옷을 갈아 입고 씻던 남자는 오늘 따라 늦은 이유에 대해 길게 변명했다. "얘기 좀 해. 어떻게 사람이 바뀌질 않아? 늦으면 걱정하는 사람 생각해서 전화 한 통 달라고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요구야?" 아내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를 잡아 세웠다. K보다 한 살 연상인 아내는 사회복지사로 10여 년을 일하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일을 그만둔 전업 주부였다. 아이 둘을 키울 때는 몰랐지만, 최근부터 중·고등학생이 된 두 아들에게 손이 덜 가자 하루하루를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지만, 사업한다고 늘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더 늙으면 남편과 자신, 둘 만이 보내야 할 시간이 몇 십 년인데 이렇게 정 없이 그 시간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남편을 더 자신 옆에 붙잡아 두고,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해로해야 할 대상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아내의 성화에 K는 고분고분해졌다. "앞으로는 전화 미리 하고, 전화 오면 꼭 받을 게" 했지만, 그 말은 벌써 셀 수 없이 한 말이다. 그런 K의 말에 또 아내는 서릿발 같이 곤두서 있던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날 밤 K는 아내의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잠들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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