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10

  • 독고탁
  • 입력 : 2017.08.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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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서다-10] <10편 - 연애>

그날 이후, 남자는 자주 여자를 보러 갔다.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떠한 말도, 어떠한 눈빛도 여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사귀자'는 고백 이후로 최선을 다하고 싶어했다. 주로 남자가 맛집을 소개했고, 둘은 술을 매개로 데이트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남자가 여자의 회사 근처로 찾아갔고, 시간이 빠듯한 날은 여자의 집 근처 실내포장마차에서 닭똥집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홍대 인근은 누구도 의식하지 않아 좋았고, 가로수길은 아기자기 해서 좋았다. 여자는 소주를 좋아했고, 감성적인 브랜드 네임이라며 '처음처럼'을 고집했다. 두 사람은 안주로 뜨끈한 어묵탕을 좋아했다. 그전까지 '참이슬'을 즐기던 남자는 그때 이후로 꼭 그녀와 함께가 아니어도 '처음처럼'을 먹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났다. 여자는 긴 숄을 늘 걸치고 다니는 걸 좋아했고, 겨울 바람을 차갑다고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 겨울, 둘은 어묵탕처럼 뜨거운 중년의 사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최소한 남자에게는 새로운 연애의 시작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사소한 것에도 진심을 담아 친절하려고 애썼다. 여자는 그런 K가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뭔지 모를 위로를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남이 잦아질수록 남자는 불안했다. 그것은 정체 모를 연애의 시간 때문이었다. 여자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S는 조금씩 곧잘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기도 했고 남자와의 대화 중간중간 웃음도 잦아졌다. 남자는 그 겨울 새로운 연애가 금방이라도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몰래 하는 사랑이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함도 있었다. 더구나 뒤늦게 찾아온 지금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고, 그것은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12월로 접어들어 겨울이 성큼 다가온 그날 저녁, K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S였다. '아프다……'고 쓰여 있었다. 지난날 쏜살같이 택시를 타고 그녀를 만났던 것처럼 남자는 열 일을 제쳐 두고 택시를 탔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고 했던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열정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프다'는 말은 참 많은 의미가 있을 거라며 남자는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했을까?' 생각할수록 남자는 오늘 밤은 꼭 여자에게 각인될 만한 남자로 남고 싶다고 다짐했다. 택시는 남자를 압구정동의 골목길에 남겨놓고 떠났다. S는 노래방에 있었다. 혼자였다. 남자가 들어서자 노래 목록을 이리저리 뒤지던 여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누지 못할 힘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는 털썩 남자를 옆자리에 앉혔다. 여자는 뚫어지게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하는 표정으로. 왜 이 시간에 이곳에서 내 옆에 앉아 있는 거죠? 하는 표정으로. 그 순간, 술에 취해 호기심 가득하던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의 표정이 만 분의 일 초 만에 바뀌던 찰나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이, 이제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짧은 순간 표정이 바뀌더니 남자의 구멍 난 가슴에 하염없이 여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아직도 여자의 눈물은 당황스러웠다. 세 번째 보는 여자의 눈물. 남자는 천천히 입술을 여자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눈물샘을 입술로 막아 보려고 했다. 부드럽게 여자의 눈물을 핥았고, 양 볼을 왔다 갔다 하며 최선을 다해 여자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여자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둘은 떨어지지 않았고, 한참이나 더 여자는 눈물을 흘렸고, 남자는 그 눈물을 받아 마셨다. 남자는 여자의 눈물이 늘 궁금했다. 지난여름, 탁자 건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 손가락 끝에 남아 있던 눈물 맛을 남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이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날이었다면, 오늘은 여자의 가슴을 통째로 이식한 것 같았다. 여자의 눈물이 많기도 했고,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는 싹싹 빨아먹었다. 여자를 오롯이 이해하고, 그녀의 아픔을 남자는 대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여자는 남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여자를 소파에 기대게 하고 팔을 둘러 옆으로 비스듬하게 안고는 이제 대담하게 여자의 눈물을 혀를 이용해 가볍게 핥아 주었다. 여자는 그 순간이 민망했는지, 한참을 울어서인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남자는 그제서야 여자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서로의 입안은 짠맛으로 뒤엉켰다. 여자의 눈물은 정말 짜고, 진했기 때문에 키스는 금방 끝났다. 첫 키스나 마찬가지였다. 키스를 마친 두 사람은 신뢰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우리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인가!' 하고 둘은 생각했다.

그 노래방은 세상 속에 있지 않았고, 그 시간은 시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둘은 또 생각했다. K와 S는 더 이상 자신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도, 시간도, 존재도 더 이상 둘 사이에 개입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누구의 남편도 아닌,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주름과 검버섯이 살짝 오르기 시작한 40대의 중년도 아닌, 동화 속의 피터팬으로, 영화 속의 장동건으로, 드라마 주인공인 박서준으로 변하고 싶었다. 아니, 그렇다고 착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가슴과 영혼이 너무 뜨거워서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방금 한 여자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의 절반을 살면서 남자는 자신이 이토록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었다. 그 모든 깨우침은 여자의 눈물로 시작되었다.

둘은 목 마르다는 듯이 탁자 위의 남은 맥주를 따라서 건배를 한 뒤 주섬주섬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이번 주말에 제주도 갈래요?" 손을 잡고 걷다가 여자가 말했다. 차가운 북풍이 가로등 불빛을 따라 휘휘 흩날리다 남자의 목덜미를 시리게 지나간 뒤였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후후 웃으며, "제주도 푸른 밤 보고 싶지 않아요?"라며 툭툭 말했다. "네. 가고 싶어요." 남자는 약간의 주저함 끝에 그렇게 말했다. 그 주저함은 무슨 고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여자가 먼저 제안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잠깐 남자는 여자의 말뜻을 헤아리느라 속이 메슥거렸다. 남자는 미안했다.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못해서 여자가 민망해하면 어쩌나 자책했다. 택시는 두 사람을 여자의 집 앞에 내려 놓고 사라졌다. "잘 들어가요." 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는 지난번처럼 총총 사라졌다.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주도의 푸름 밤은 아니었지만, 초겨울 서울의 밤 하늘은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차가운 소리를 내며 웅웅대고 있었다.

[독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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