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지구를 지켜라'...블랙코미디로 살아나다

  • 김연주
  • 입력 : 2017.08.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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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85]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인간의 불행은 외계인의 소행이며 외계인에 의해 지구가 멸망한다고 믿는 병구. 그는 재벌 3세이자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지구 총사령관 강만식을 찾아내 납치한다. 병구는 만식에게 외계인 왕자를 만나게 해달라며 고문하고 협박한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줄거리다. 원작은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인 동명의 영화로 2003년 개봉 당시 평단의 호평에도 7만3182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친 비운의 작품이다. 외계인이라는 B급 소재와 논리적으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 전개가 연극무대와 만나 풍자와 해학을 입고 되살아났다. 관객들에게 외면 받았던 영화가 무대를 만나 다시 꽃 핀 것이다.

작가 조용신이 극본을 쓰고 연출가 이지나가 각색과 연출을 맡아 지난해 초연 무대에 올라 객석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올해 충무아트센터에서 재연무대에 오른다. 이지나 연출은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명확한 주제에 간단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어 스토리텔링 중심의 연극이 아닌 독특한 스타일과 컬트적인 실험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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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와 달리 연극에서는 주인공 병구, 강만식, 병구를 돕는 순이와 멀티맨 4명만 등장한다. 연극에서만 가능한 '멀티맨'(한 사람이 여러 역을 연기하는)이 추형사를 비롯해 10명이 넘는 배역을 소화한다. 소동극 느낌을 강화해 연극적 재미를 더했다. 멀티맨은 '박근혜 대통령의 유체이탈화법', '고승덕 전 서울시장 후보의 미안하다'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미안하다' 짤을 쳐보시길 바란다) 등 각종 성대모사로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초연 때 사용했던 영상이 재연무대에서는 사라졌다. 대신 무대 위 설치된 두 개의 회전문과 조명의 사용을 통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연극적으로 재치있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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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지구를 망가트린다는 이 엉뚱한 소년의 상상으로 인해 고발되는 사회의 부조리가 아프다. 대물림 되는 가난과 가정폭력, 이익만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기업,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소년원의 교도관, 소년의 주위를 돌고 도는 사회 부조리는 외계인의 악행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불공평하고 해결이 불가능하다. 물파스, 잉크, 때수건 등으로 외계인을 고문한다는 기이한 소년의 행동 이면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보려 했지만 끝내 실패한 병구의 아픔이 있다. 열심히 살아보려는 그의 노력은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외계인을 고문하는 행동만큼이나 무의미하다.

14년 전 영화 개봉 당시에도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빈부격차가 올 한 해 화제가 됐던 '수저계급론'으로 연극에 새롭게 반영됐다. 병구의 상대역인 만식의 캐릭터가 확 바뀌었다. 영화 속 백윤식이 연기했던 만식은 초연 때 영화를 따라 중년 배우에게 맡겨졌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안하무인 재벌 3세로 연령층을 확 낮췄다. 병구와 만식을 비슷한 나이대로 설정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두 청년의 삶과 사상을 대비시킨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병구는 외계와 외계인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불우한 환경 때문에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청년으로 설정돼 실업난에 고달파하는 이 사회의 아픈 청춘을 대변하는 듯하다. 극 말미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반전이 준비돼 있다. 이 역시 엉뚱하면서도 씁쓸한,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결말이다.

초연 당시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멤버 키의 연극 데뷔작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번 재연무대에도 키가 병구로 선다. 그와 함께 박영수, 정욱진, 강영석이 병구 역으로, 허규, 김도빈, 윤소호가 만식역으로, 김윤지와 최문정이 순이 역으로, 육현욱과 안두호가 멀티맨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기자가 본 박영수, 윤소호, 최문정, 안두호 캐스트는 객석과 함께 호흡하며 호응을 이끌어내는 무대 매너가 돋보였다. 10월 2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 전석 5만5000원.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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