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차 배우 이호재 명연기 전석 매진으로 화답한 관객

  • 김연주
  • 입력 : 2017.08.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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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노인의 풋풋한 첫사랑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
55년차 배우 이호재의 명연기
'늘푸른 연극제' 마지막 작품..전석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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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86] '노인의 사랑이 왜 위대한데. 퍼주고 퍼줘도 아까울 게 없거든. 죽음이 코앞에 있는데 아까울 게 뭐 있겠냐. 한데 이십대 땐 그게 되냐? 재고 또 재고, 줄까 말까 손핼까 아닐까, 계산 속이 복잡하잖아. 그건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 아니지. 비즈니스지.'

엄마 미소를 짓게 된다.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고들 한다. 나쁜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그만큼 다시 순수해진다는 의미 아닐까. 사랑하면 주고만 싶은, 작품 속 자룡의 대사처럼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 그런 아낌없는 사랑을 다시 한번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노년인가 보다. 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도 "젊은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노년의 사랑은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고 정의한다.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완애 자룡 다혜, 황혼을 앞둔 국민학교 동창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50년이 지나서야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었단 걸 깨달은 세 남녀의 좌충우돌 삼각관계를 다룬다.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에게 헌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월남전 파병 등 곳곳에 이호재 개인사가 녹아들어 있다. 이호재(76)는 고지식한 구두쇠 완애 역으로 무대에 선다.

1963년 '생쥐와 인간'으로 무대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연극무대만 55년째. 거쳐온 작품이 수백 편이 훌쩍 넘는다. 고매하고 성실한 선인부터 간교하고 음흉하고 게으른 악인까지 오가며 '천의 얼굴'이란 별명을 얻은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는 고집불통 노인의 풋풋한 첫사랑을 다채롭게 풀어낸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가도 첫사랑 앞에만 서면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아이처럼 질투한다. "이만희 작가 작품들이 재미있었어요. 시대가 유쾌한 시대가 아니었는데 이만희 씨 작품은 늘 즐거웠어요. 즐거우면서도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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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55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연극 한 길만 걸을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었어요." 연기가 천직 아니냐고 물었다. "글쎄. 우물쭈물하다 연극판에 들어서서 나가질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우렁차고 발음이 좋다는 이유로 학생들 앞에서 뭔가를 읽었는데 그게 4·19 혁명 선언문이더군요. 합격했던 연세대학교가 취소통보를 해와 허송세월하고 있는데 친구 한 놈이 같이 연극을 해보재요. 동랑 유치진 선생이 드라마센터라는 극장을 세우고 한국연극아카데미를 여는데 학생을 뽑는다면서요. 할 일도 없으니 술이나 얻어 마실 생각이었는데 친구놈은 떨어지고 덜컥 저는 붙었죠. 그날 이후 친구는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나는 반대로 55년째니 인생 참 알 수 없죠." 후회는 없는지 물었다. "지금도, 매순간 후회한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무대는 항상 힘들어요. 한평생 가난과 싸웠어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활이란 실질적인 고민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죠."

겸양과 겸손. 자신을 낮추는 말 뒤로 이상하게 '연극은 나의 운명'이고 '나는 타고난 연극배우'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가 걸어온 배우로서의 행로를 되짚어 보면 이는 분명하다.

이호재는 그 시대 배우들을 따라 1980년대 열풍이 불었던 영화와 TV 드라마에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다시 홀로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당시 제 나이대 배우들 대부분이 연극판을 떠나 TV로 갔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태어나서 가장 큰 돈을 만져봤던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모두 떠나버리면 연극은 누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날 잡고 모든 방송 출연을 딱 접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왔죠."

연극평론가 구하서는 일찍이 그의 연기에 대해 '연기의 교과서, 대사의 달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무대 위에서 유연성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라고 극찬했다. 오태석 연출은 '무대가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미세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즉시 포착, 반응하는 민감한 연기자'라고 평했다. 유덕형도 그를 '드라마센터가 길러낸 가장 흠 없는 연기자'로 꼽았다. 그런 그는 1970~1990년대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동아연극상, 이해랑연극상 등 온갖 연기상을 휩쓸었고, 2011년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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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들었다는 연극이 그를 붙잡아 둔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관객'을 말했다. "관객과의 호흡이 제일이죠. 내가 즐거이 연기할 땐 객석도 함께 웃고 내가 대사를 멈추는 순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일순의 정적. 함께 숨 쉬는 걸 느끼는 그 기분은 연극을 안 해보면 절대 몰라요."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에는 평소 폭발적인 에너지와 카리스마 대신 이호재의 '수줍은 미소'를 볼 수 있는 무대다. '할배파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 천진난만하면서도 노년의 능청스러움을 완벽하게 소화한 자룡 역의 배우 최용민(64)과 고단한 삶을 뚝심 있게 이겨나가는 두 남자의 곱디 고운 첫사랑 다혜를 맡은 배우 남기애(55)의 호흡이 빛난다. 세 사람과 우리나라 말맛을 제일 잘 안다는 이만희의 작품이 정말 우리 옆집에 이렇게 예쁜 할머니와 귀여운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작품은 개막 3일 만에 전석 매진됐다.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지난달 28일 개막한 '늘푸른연극제'의 마지막 작품이다. 한국연극협회가 주최·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이 연극제는 우리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연극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행사로 선정 연극인들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올해는 평생을 연극 외길을 걸어온 연극계 원로 4인인 오현경 배우, 노경식 작가, 김도훈 연출가, 이호재 배우의 작품이 선정됐다. 2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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