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바람 끝에 서다-11

  • 독고탁
  • 입력 : 2017.08.30 06:02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람 끝에 서다-11] <11편 - 아내의 눈물>

남자는 여자가 왜 아픈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사는 게 아픈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무게. 누구나 짊어지고 가는 것이지만, 여자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남자의 직감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을 때 오는 아픔. 여자는 그 아픔을 지금 견디고 있었다. 남자는 함부로 여자의 아픔과 이유를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함께하기로 했다. 울적할 때는 술친구로, 비 오는 날에는 함께 드라이브를 떠날 것이다. 하늘이 맑아 공기가 좋을 때는 연인처럼 강가를 걸을 것이다. 혼자 상상만 했지만 남자는 큭큭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기분 좋은 속웃음과 함께 주말은 다가 오고 있었다.

주말에 제주도를 가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었다. 위험한 시도였다.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제주도. 회사 워크숍으로 가보고, 제주 사는 친구의 부친상 때 다녀왔고, 2년 전에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다녀 온 것이 전부였다. 가깝고도 먼 섬나라. 탐라를 가야 한다. 주말이 오기까지는 이틀이 남았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얼핏 설핏 여자의 눈물을 곱씹었다. 아직도 입안에서 짠 내가 나는 듯했다. "제주도 일정과 숙소는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네~. 맘대로 하세요." 문자를 주고받고는 남자는 살짝 흥분했다. 여자와 단둘이 제주도를 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남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 듯했다. 금요일 저녁 제주행 비행기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제주에 내려가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바닷가에 홀로 있는 작은 풀빌라를 통째로 빌릴 수 있는지 물어 놓았다. 제주도로 치면 동남쪽에 있는 예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 놓았다며 친구는 으스댔다.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해 있으며, 따끈한 목욕을 즐길 수 있는 편백나무 욕조가 있는 2층짜리 신혼집 같은 곳이라고 자랑했다. 그런 곳을 왜 필요로 하는지 제주도 친구는 남자에게 묻지 않았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는 K를 가장 잘 아는 남자친구였다. 같이 데모를 하던 그는 어느 봄날 종로에서 같은 편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머리를 수술한 적이 있었다. K와는 무엇이든지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끔 2대2 소개팅도 했고, 학교 뒷산에서 몰래 삼겹살을 구워 놓고 낮술을 먹기도 했다.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고향인 제주도로 발령을 받아 월급쟁이로 살고 있었다. K가 내려온다는 말에 같이 술 한잔 하는 기대를 했지만 K는 단숨에 거절했다. 미안해 하는 K에게 제주도 친구는 "아, 뭔가 있구나!" 맞장구를 치고는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았다.

K는 렌터카를 예약한 다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직은 낯선 그녀와 제주에서 단둘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 내는 것은 예상하지 않았던 시험 문제를 푸는 것과 같았다. 결국 K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잠깐 한라산 중턱으로 차를 몰고 바람을 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숙소에서 하루 종일 머물다가 배가 고프면 식당이나 잠깐 다녀오고 또 숙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두렵고 어색해도 이제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에게 2박3일은 짧고 금방 지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K는 숙소 근처 맛집 몇 군데를 확인해 뒀다. 맛있는 음식은 분명 서로에 대한 호감을 상승시킬 거라며 갈치조림, 물회, 흑돼지, 고기국수 집 등을 후보로 꼽아 놓았다. 대략적인 준비 상황을 S에게 알리자 그녀는 시큰둥하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동의했다. K는 아내에게 제주도로 워크숍을 간다고 둘러댔다. 갑작스러운 워크숍 출장에 의아해하던 K의 아내는 "주말에 애들하고 자기 겨울옷 사러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하며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여느 때처럼 핸드폰 게임에 다시 집중했다.

금요일 K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S와 함께 제주도를 가는 날이기도 하지만, 전날 밤 아내와의 말다툼이 하루 종일 K를 괴롭혔다. 가볍게 짐을 꾸려 집을 나올 때도 K의 아내는 며칠 동안 집을 비울 남편의 출장길(?)에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전날 K는 평소와 같이 술에 취해 먼저 자고 있는 아내 옆으로 소리를 죽이고 모른 척하며 누웠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취기 어린 남자가 잠시 잠을 청하는 사이 "우리 왜 살아? 무엇 때문에 살아내야 하는 거야?" 아내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채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컴컴한 방안을 비추는 하늘로 쏜 조명탄 같았다. 남자는 머리가 맑아졌다. 이제 아내는 남자가 애써 무시했던 현실을 투명하게 밝힐 것이다. K가 자신에게 애정이 있는지,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성장에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었으면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 남자가 대꾸하기 싫어했던 주제들이 조명탄이 밝혀 놓은 무대 위로 줄을 설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지적하는 모든 불만 앞에 발가벗겨질 각오를 했다. 하지만 K의 아내는 남자가 긴장하며 기대한 것과 달리 아무런 말을 잇지 않았다. 남자는 또 시작이냐는 말의 다름 아닌 행동으로 몸을 반대로 눕혔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조명탄의 불빛이 희미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K의 아내는 어깨를 가느다랗게 흔들며 힘겹게 흐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아내의 속으로 우는 듯한 흐느낌을 등 뒤로 송곳에 찔리는 듯한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미안했다. 함께 사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와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가에 더 목말라 하는 여자의 차이는 가끔 이렇게 툭 치고 나오는 갈등으로 번졌다. 남자는 아내의 고통을 여자가 속으로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이해하려고 했다. 요즘 들어 자주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남자는 부부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답을 이불 속에 묻어 버렸다.

하루 종일 전날 밤의 아내를 생각하던 K는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금요일이었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엄숙했고, 모두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던 K는 아직 그녀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사무실을 나왔다. 홍대 근처 공항 가는 전철역에서 둘은 만나기로 했다. 광화문을 나선 K는 걸어서 신촌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고, 일찌감치 홍대 근처에 도착해 주변을 배회했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S는 연예인 같았다. 둘은 손을 잡고 지하철에 올랐다. K는 이번주에 며칠 동안 느꼈던 어중간한 설렘은 공항 가는 지하철에 내려 놓았다. 약간의 불안과 남모를 모험에 끌리듯 전동차는 스르르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남자의 불안을 눈치챈 듯 S는 남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미열 같은 미지근한 온도가 약간의 안정감을 주는 순간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공항은 꽤 붐비고 수선스러웠다. 만석으로 붐비는 기내에서 남자는 마음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난다고 해도 닥쳐보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내가 원했던 일이니까!' 하는 순간 비행기가 힘껏 하늘로 솟구쳤다. 남자의 마음도 덩달아 떠올랐다. 알 수 없는 기류 변화로 비행기 동체가 요동을 쳤다. 남자는 무서웠다. 언젠가는 내려올지 모를 감정의 비행이 시작된 것이다.

[독고탁]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