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 입은 소녀와 함께 하는 관객 1명을 위한 60분 연극

  • 김연주
  • 입력 : 2017.08.3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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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87]
공연 '천사-유보된 제목'
극장공간 자체가 연극작품
mp3, VR착용하고 공간체험
"극장서 내면 응시하기를"


극장(남산예술센터) 안으로 들어가자 객석에 아무도 없다. 무대 역시 텅 비어 있다. '드라마'가 발생하지 않는 무대는 외롭고 낯설다. 어두운 객석이 밝아지자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다. 홀연히 다가와 무심하게 옆자리에 앉는다. 다시 객석이 암전된다. 손전등을 비추며 어디론가 이끈다. 그를 따라 분장실, 대기실, 창고 등 무대 너머 남산드라마센터 곳곳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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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대표 주철환) 남산예술센터는 2017년 시즌 프로그램인 장소특정 공연 '천사-유보된 제목'(연출 서현석, 아트선재센터 공동 제작)을 선보인다. 60분짜리 1회 공연은 오로지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 진행된다. 관객은 MP3플레이어와 VR를 착용하고 배우 한 명과 무대 너머 극장의 비밀스러운 곳을 거닐며 그곳에 설치된 작품들을 체험하게 된다.

연출을 맡은 작가 서현석은 영등포시장('영혼매춘'), 세운상가('헤테로토피아'), 서울역('헤테로크로니') 등 관객이 장소와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상황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작업을 해 왔다. 이번 '천사-유보된 제목'은 '오래된 극장'이란 장소(남산예술센터)를 통해 역설적으로 '개인의 심연'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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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석 연출은 "원래 극장은 공공장소로 대중은 연극을 감상함으로써 교감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공유했다"며 "하지만 '천사'에서 관객은 분장실, 대기실 등 극장의 깊숙한 곳으로 홀로 걸어들어 가게 된다. 이 고독한 여정에서 고립된 관객은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말이 없는 흰옷을 입은 배우 단 한 명과 고요한 극장 내부를 배회하는 경험은 긴장감을 넘어 공포감마저 든다.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오래된 극장의 공간들. MP3에서는 기억에 관한 문구들이 나지막이 들려온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도착하게 된 곳에서 관객은 VR를 쓰고 또 지금까지 걸어왔던 여정을 다시 한번 가상으로 반복하게 된다. 나의 기억일 수도 있고, 혹은 극장에 머물렀던 타인의 시선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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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유보된 제목'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나치를 피하는 긴 여정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철학가 발터 벤야민이 쓴 '역사철학테제'에서 따왔다. 벤야민은 본인의 애장품이기도한 파울 클레의 드로잉 '새로운 천사'의 얼굴에서 순수함 속에 깃든 멜랑콜리와 공포를 발견하고 이런 천사를 현실에 아직 오지 않은 희망에 비유한다.

서현석 연출은 "벤야민이 천사의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을 발견한 것처럼 관객들은 '극장'이란 장소에서 각자의 그리움, 슬픔, 공포 등 잊어버린 자신의 기억 혹은 공간에 깃든 다양한 감정을 만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하루 40회 총 6일 공연으로 240명이 관람 가능하다. 9월 7일까지, 남산드라마센터.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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