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치는 설원 속 시신, 차가운 복수극 '윈드 리버'

  • 양유창
  • 입력 : 2017.09.15 16:20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시네마&-156] 황량하고 거대한 눈밭을 스노모빌을 타고 질주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숲속에 엎드리더니 사냥총으로 퓨마를 겨냥해 쏜다. 양을 괴롭히던 퓨마는 하얀 눈 속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진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는 더 센 강자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인디언 보호구역 내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지역이다.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셰리든은 자신이 연출까지 맡은 이 영화에서 관객을 또다시 잘 알려지지 않은 비정한 현실로 초대한다. 시카리오의 미국과 멕시코를 연결하는 마약터널, 로스트 인 더스트의 텍사스와 뉴멕시코의 폐허 지대에서 유유자적하는 은행강도에 이어 '윈드 리버'에선 눈보라가 휘몰아쳐 풀 한 포기 구경하기 힘든 설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렇게 삭막한 곳에도 삶은 있다. 삶이 있으니 당연히 죽음도 있다. 너무도 외딴 이곳의 죽음은 잘 발견되지 않아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는다. 절박한 삶과 비극적인 죽음 속에서 이곳 사람들은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 딸을 잃은 백인 코리(제러미 레너)와 인디언 마틴(길 버밍햄)은 동병상련에 처해 서로를 위로한다. 셰리든 감독의 관심은 이처럼 미국 사회에서 극단적 상황에 몰린 이들을 향해 있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퓨마 사냥꾼 코리는 사냥을 나가던 길에 우연히 나탈리(켈시 애스빌)의 시신을 발견한다. 나탈리는 마틴의 딸이자 3년 전 의문사한 자신의 딸의 친구다. 강추위 속에 시신은 맨발이고 강간 당한 흔적이 있다. 코리는 시신을 보고 3년 전이 떠올랐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그는 냉철하다. 이곳에선 차가워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안다.

외딴 지역의 범죄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FBI의 초보 수사관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이 윈드 리버를 찾아온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왔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라스베이거스라는 단어는 머나먼 외계 행성만큼이나 이곳 사람들에게 별세계처럼 들린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차갑고 건조하게 삭막한 풍경과 죽음을 관조하던 영화는 제인이 등장하자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제인은 이곳의 가혹한 생활환경에 충격을 받지만 코리의 도움으로 점점 자신의 임무에 집중해간다. 버려지고 잊혀진 냉혹한 땅에서 진실을 캐내려 고군분투하고 희생자에 공감해주는 사람, 제인은 그런 캐릭터다. 그녀가 등장하자 영화에 온기가 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곳에선 누구도 당신을 책임져주지 않아요." 코리는 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인은 코리의 죽은 딸의 방한복을 빌려 입고 있어 두 사람은 가끔 부녀 관계처럼 보인다. 어쩌면 코리의 이 말은 죽은 딸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코리와 제인은 함께 살인자를 쫓기 시작한다.

영화는 쉽게 끓어오르지 않는다. 카메라는 범인을 추적하는 코리와 제인을 묵묵하게 쫓는다. 살인보다 발견이 더 어렵다는 이곳에서 3년 전 사건이 단서가 되어 마침내 범인이 드러나고 복수의 시간이 이어지지만 영화의 온도는 줄곧 비등점 아래에 있다. 양을 괴롭히는 퓨마를 잡아도 그 자리에 다시 눈보라가 몰아쳐 흔적을 없애버리듯, 복수가 끝난 뒤에도 이 땅에선 삶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기에 분위기는 시종일관 차분하다.

프리미엄 첨부 이미지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딱 한 번, 비등점을 넘는 순간을 준비한다. 제인이 눈물을 터뜨릴 때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모든 사건이 정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고 희생자에게 감정이입한다.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 자의 염치라고 말해주는 이 눈물은 울림이 크다. 단지 살인사건과 이에 대한 복수의 과정을 넘어 '윈드 리버'는 그것이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절제된 세련미 속에 꼭 필요한 만큼의 아름답게 정돈된 대사들이 가슴에 박힌다. 14일 개봉.

[양유창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