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은 오직 사랑... 연극 '발렌타인 데이'

  • 김연주
  • 입력 : 2018.01.0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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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테이지-105] 이건 사랑 이야기다. 작품 내내 '사랑'이란 단어가 다양한 색깔과 크기로 무대를 떠다닌다. 핑크빛만은 아니다. 때로는 정열적인 핏빛이고 때로는 다 타버린 잿빛이다.

18살의 발렌틴(이명행)과 발렌티나(정재은)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둘은 맺어지지 못한다. 돈을 벌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난 스무 살의 발렌틴은 사랑하는 발렌티나가 구세프라는 해군 장교와 결혼한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모스크바로 돌아가지만 발렌티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구세프와 결혼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고 거짓말을 한다. 믿음을 저버린 발렌티나를 기다리는 대신 발렌틴은 그의 주위를 맴돌던 까쨔(이봉련)와 결혼해버린다. 15년이 흐른 어느 날, 서른다섯 살의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발렌티나는 구세프와 결혼하지 않았고 거짓 전보를 보낸 사람이 까쨔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서로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 하지만 까쨔를 사이에 둔 채 애매한 관계를 이어나갈 뿐이다. 결국 발렌티나와 까쨔 두 여자 사이에서 죄책감으로 고통받던 발렌틴은 발렌티나의 마흔 살 생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남겨진 발렌티나는 지난 세기의 사랑에 발이 묶인 채, 발렌틴이 살던 공동주택에서 까쨔와 불편한 동거를 이어나간다.

연극의 배경은 발렌티나의 60세 생일날이자, 20년 전 발렌틴이 죽은 기일. 연극 제목이 '발렌타인 데이'인 이유다. 2월 14일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로맨틱한 날을 예상한 관객에게는 퍽 당황스러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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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를 맞아 발렌티나는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사실상 사랑을 추억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삶은 사랑으로 뒤범벅돼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과거 꿈이 쉼 없이 오간다. 거친 붓질이 마치 고흐가 그린 것 같은 방 한 편에 눈이 내리다, 낙엽이 내린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키스를 하고, 눈 위를 뒹굴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인다.

이런 사랑을 해본 사람에게는 사랑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인상주의 화가의 캔버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삼각관계는 귀에 익은 통속드라마 속 배경음악처럼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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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연인들이란 원래 유치하고 호들갑스러운 법이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랑에 공감하기란 관객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은 꼿꼿이 사랑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랑이 생긴 겁니다." 극 중 발렌티나의 대사처럼 그저 관객들이 이 작품에 비논리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길 기대하는 듯하다. 김종원 연출은 "이 작품은 사랑이 전부고 그 사랑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며 "변질되고 왜곡된 사랑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사랑, 태초의 사랑, 아무 부끄러움 없는 남녀의 사랑, 그 순수한 시절을 향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사랑 노래 중 이별 노래가 가장 사랑받듯이 작품에서도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정재은 배우가 연기하는 발렌티나의 사랑만큼이나 큰 상실감이다.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대체 끝나버린 사랑은 어찌 다시 끝내야 하느냐고 묻는 황폐한 눈빛. "아무도 원한 적 없는데 사랑이 인간에게 찾아왔다"고 말하는 담담한 목소리. 유독 크게 느껴지는 방에 홀로 서 있는 그녀 주변으로 고독이 꽉 차 있다.

러시아 연극답게 은연중에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춘다. 보다 보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가 연상된다. '솔직하지 못해서' '남자답지 못해서' '여자답지 못해서' 고통스러웠단다. 세 사람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데에는 사회적 관습의 영향도 크다. 발렌티나 어머니는 가난한 남자에게 딸을 시집 보내지 않으려 했다.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발렌틴은 결혼 생활을 끝맺지 못했다. 세 사람은 사회가 만들어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런 쳇바퀴를 돌고 돈다. 희곡 서두에 작가가 이 작품은 "원시주의를 향한 멜로드라마"라고 썼단다. 원시주의란 이 뜻 모를 단어가 말하는 바는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표현하라 아닐까.

예술의전당 '싹 큐브(SAC CUBE) 2017' 기획시리즈로 막을 올린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21세기 러시아 연극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러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주목받는 극작가 이반 뷔리파예프의 작품이다.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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