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노동자들의 식사 '아 로 포브레'와 콜라 섞은 와인의 추억

  • 나보영
  • 입력 : 2018.05.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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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와인 기행-55] 세계 어디를 가든지 되도록이면 현지식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칠레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한 말도 "파인 다이닝 말고 평소에 먹는 음식을 알고 싶다"는 거였다. 일상적인 식사가 궁금했고, 그 안에 담긴 문화를 느끼고 싶었으니까.

19세기 남아메리카 노동자들의 식사에서 유래된 음식 ‘아 로 포브레’
▲ 19세기 남아메리카 노동자들의 식사에서 유래된 음식 ‘아 로 포브레’

와이너리들에서는 화려한 정찬으로 대접받았으므로 이동하는 중간이나 기점 도시에서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가는 식당에 들렀다.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아 로 포브레(a lo pobre)'라는 걸 맛봤다. 달걀부침, 감자튀김, 어니언링 등이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 요리다.

"19세기 남아메리카의 노동자들이 한 번에 많은 열량을 섭취하기 위해 먹던 음식입니다. 가정에서 흔히 쌀밥이나 볶음밥과 함께 푸짐하게 접시에 담아 먹죠." 여행의 동반자였던 음식 전문기자 세실리아가 손짓으로 접시 위에 수북이 담긴 음식을 표현하며 말했다.

요즘은 경제력이나 계층과 무관하게 어느 레스토랑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대체로 비프스테이크나 닭가슴살구이 같은 요리에 얹어 나온다.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와 함께 나오는 '로모 아 로 포브레(lomo a lo pobre)'가 가장 흔한데, '로모(lomo)'는 '등심'이란 뜻이다. 사이드 메뉴에 '아 로 포브레'가 적혀 있는 경우도 많다. 어떤 메인 요리에든 원하면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칠레 중부 지방의 대중적인 레스토랑
▲ 칠레 중부 지방의 대중적인 레스토랑

'아 로 포브레'는 고소하고 바삭바삭해서 자꾸만 손이 갔다. 옛날 노동자들처럼 몸을 쓰지 않는 현대 도시민에겐 지나친 고열량, 고지방, 고탄수화물인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고기나 볶음밥을 시킬 때마다 '아 로 포브레'를 외쳤고, 그러지 않았을 땐 결국 세실리아가 시킨 걸 집어 먹고야 말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요리엔 어떤 음료를 곁들여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육류와 어울리는 건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카르미네르 같은 품종의 레드 와인이지만, 감자튀김이나 어니언링 같은 걸 먹을 때 생각나는 건 결국 콜라가 아니던가. 세실리아에게 물었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예전엔 레드 와인에 콜라를 섞어 먹는 게 유행이었어요"라고 외쳤다.

레드 와인에 콜라를 섞은 걸 '조에 비노 코카(jote vino coca)'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건 남미 전체가 아니라 거의 칠레에서만 마시던 음료다. 주로 젊은이들이 파티할 때 애용했단다. 부드러운 레드 와인에 콜라를 들이붓다니 와인애호가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맛을 상상해봐도 왠지 가스 액체 소화제 맛이 날 것만 같아 괴로워진다. 밤새워 놀고 싶은 젊은이들에겐 탄산, 발효주, 카페인이 한 잔에 담긴 술이 최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콜차과 밸리 포도밭 풍경 /사진제공 = 칠레와인협회
▲ 콜차과 밸리 포도밭 풍경 /사진제공 = 칠레와인협회

장난 삼아 지금 당장 눈앞에서 만들어주겠다는 세실리아를 뜯어말렸다. 콜라를 들이붓기엔 너무 아까운 콜차과 밸리(Colchagua Valley)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콜차과 밸리는 세계적인 레드 와인 생산지이고, 뛰어난 스타급 와인들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요즘은 칠레 사람들도 와인에 콜라를 섞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단다. 아주 오래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술일 뿐이라고. 그날은 추억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며 오래도록 레스토랑에 머물렀다. 근사한 레드 와인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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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영 여행작가]

※잡지 기자 시절 여행, 음식, 와인 분야를 담당한 것을 계기로 여행작가가 됐다. 유럽, 북미, 남미,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안 다니는 곳이 없지만 특히 와인 생산지를 주로 여행한다. 매경프리미엄 외에도 '한국경제신문'과 '와인21 미디어'에 본인 이름을 건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더트래블러' 'KTX매거진' '무브' 등 여행 전문지에도 기고한다. 2018년 봄엔 가까운 식도락의 도시 후쿠오카를 다룬 여행서도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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