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그린 호퍼, 고독을 삼킨 아내

  • 조성준
  • 입력 : 2018.08.0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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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4] 에드워드 호퍼(화가, 1882~1967)

◆ 도시의 밤

깊은 밤 깜깜한 골목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가로등 불빛 없는 거리를 걷다 보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된다. 누군가 따라오는 듯해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이 으스스한 기분은 저 끝에 반짝이는 편의점이 눈에 들어올 때쯤 풀어진다. 편의점엔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건 왠지 위안이 된다. 편의점이 도시의 등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렇게 적막한 도시 구석구석 걸어본 사람은 안다. 도시의 밤은 낮보다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24시간 김밥집에 홀로 앉은 사람들은 왜 이제야 끼니를 때우는 걸까. 업종을 알기 어려운 저 간판 뒤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낮에 걸었던 이 길은 왜 낯선가.

Nighthawks, 1942.
▲ Nighthawks, 1942.

◆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에는 도시의 밤이 간직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정면에 한 싸구려 식당이 보인다. 식당은 행인 한 명 없는 길모퉁이에서 홀로 불빛을 내뿜는다. 그 안엔 잘 차려입은 남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맞은편에 앉은 남녀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없다. 연인으로 보이지만 확신할 수 없다. 야심한 시간에 한 푼 더 벌어보려는 식당 주인은 손님에게 기계적으로 말을 건다. 그의 퇴근은 아직 멀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주로 현대인의 외로움이란 주제로 해석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결은 조금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고독과 우울, 또 다른 누군가는 불안과 공포를 읽을지도 모른다. 호퍼의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호퍼는 식당, 호텔, 주유소, 카페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인물은 공허해 보인다. 그들이 어떤 사연을 지녔을지 상상하게 된다. 작년 국내에 '빛 혹은 그림자'라는 책이 출간됐다. 16명의 작가가 호퍼 그림에서 느낀 인상만으로 쓴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다. 스티븐 킹, 조이스 캐롤 오츠 등 대가들이 호퍼의 그림에 매료돼 상상을 펼쳤다.

예술가들의 예술가인 호퍼는 회화는 물론 영화와 광고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일이 소개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글은 호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 쓴 게 아니다. 대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금발여성의 삶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Hotel Room, 1931.
▲ Hotel Room, 1931.

◆ 언제나 조세핀 니비슨이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호퍼는 화가가 아닌 다른 꿈은 꾸지 않았다. 순수예술은 그 시절에도 돈이 안 됐다. 호퍼는 당시 대표적 상업미술인 삽화를 그리며 미술계에 발을 들였다. 원하지 않는 작업을 10년 넘게 이어온 무명화가의 삶은 자괴감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벼락같은 축복을 선물한 사람은 조세핀 니비슨이었다. 뉴욕미술학교 동급생인 호퍼와 조세핀은 졸업 후 한 모임에서 만나 연인이 된다. 화가였던 조세핀은 미술관으로부터 작품 전시 요청을 받고, 애인의 그림도 나란히 걸릴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관객들은 호퍼의 그림에 열광했다. 성공의 서막이 올랐다. 이듬해 1924년 둘은 40대 초반 나이로 결혼했다. 같은 해 개인전을 연 호퍼는 모든 그림을 팔아치웠다.

꽃길이 펼쳐진 호퍼와 달리 결혼과 함께 조세핀의 화가 경력은 종료된다. 조세핀은 남편이 그림에 전념하도록 살림을 도맡았다. 내성적인 호퍼를 대신해 미술관을 뛰어다니며 전시일정을 잡고 조율했다. 조세핀은 호퍼의 아내이자 매니저였다. 조세핀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화가의 길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호퍼는 아내의 실력을 깎아내렸다. 조세핀이 그림을 그리면 "볼품없는 작품"이라며 폭언을 쏟아내 꿈을 접게 만들었다.

그림이 다가 아니었다. 엄격한 청교도 가풍을 물려받은 호퍼는 보수적이었다. 밀려드는 이민자를 향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열성적인 공화당 지지자였다. 당연히 가부장적이었다. 호퍼는 아내가 전통적인 주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조세핀이 운전대 잡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운전하지 말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자 호퍼는 아내의 양쪽 다리를 잡아당겨 차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호퍼의 잦은 폭언과 폭력에 조세핀이 일방적으로 당한 건 아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호퍼를 할퀴고, 꼬집고, 목청껏 소리 질렀다. 이 전쟁 같은 관계는 호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내의 창작 충동을 억누른 호퍼는 자신의 모델로는 조세핀을 고집했다.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금발 여성은 대부분 조세핀이다. 어떤 역할이 요구되더라도 조세핀은 탁월하게 해냈다. 호퍼는 결혼 후 미술사에 이름을 새기며 거장으로 예우 받았고, 조세핀은 그의 작품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늙어갔다.

Morning Sun, 1952.
▲ Morning Sun, 1952.

◆ 여성의 그림자

이 둘은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며 끝까지 함께했다. 호퍼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바로 곁에 조세핀이 있었다. 그녀의 일기에는 독단적인 남편을 원망했던 마음이 절절하게 적혀 있지만, 호퍼의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람으로서의 감탄도 기록돼 있다.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명작을 만들 때의 황홀함도 담겨 있다. 40여 년을 함께한 부부를 딱 잘라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호퍼의 그림 속 적막함에 휩싸인 금발 여성, 다시 말해 조세핀의 텅 빈 표정을 보면 그녀가 반평생 지녔을 고독의 깊이를 막연히 가늠하게 된다. 예술가라는 꿈을 접게 만든 사람의 꿈이 차근차근 현실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 조세핀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하지 않은 자와 수없이 충돌하며 끝내 체념해야 했던 이 여성의 그림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호퍼의 화폭에 담겨 '불후의 명작'으로 불린다. 조세핀의 그림자는 어쩌면 여성, 아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 지워져 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수많은 여성들의 고독일 것이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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