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에서 만원의 가치는 얼마?

  • 정현권
  • 입력 : 2018.09.0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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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골프 오딧세이-2] 매출 3000억원대의 탄탄한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P회장(63).

자동차 부품 사업 경력 30년 동안 숱한 부도 위기를 넘긴 백전노장이지만 그도 간혹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바로 골프장 그린에서다. 최근 지인들과 경기도 가평 근처 골프장에서 스킨상금 3만원이 걸린 홀에서 50㎝의 짧은 퍼팅을 아깝게 놓쳐 그날 이후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사업하면서 웬만한 난관에도 의연히 대처하고 직원들에겐 때론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포용력 있는 리더로 통하는 그에게서 왜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걸까.

그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골프의 속성이 이런 건가. 과연 골프장에서 1만원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몇 년 전 필자가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있을 당시 주요 기업 임원 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내기 골프에서 1만원은 20만원 정도의 체감가치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설문조사라서 지금도 그 결과를 잊지 않고 있다.

'20만원 정도 가치가 있다'고 답한 임원은 60%인 18명에 달했고, 40만원 이상 3명, 30만원 3명, 10만원 6명 순이었다.

필자 친구인 중견 회계법인 J대표(57)는 최근 라운드 도중 "내기 때 1만원은 액면 그대로 1만원이 아니다"며 "자존심과 승부욕이 걸려 순간적인 체감가치는 10만원을 훨씬 웃돈다"고 말했다.

싱글 골퍼인 데다 매너 좋기로 정평이 난 한의사 조용국 씨(57)도 "특히 5만원씩 내고 스킨스 게임 시작 후 한 번도 따내지 못했을 경우 1만원은 최소 20만원 이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짧은 퍼팅을 놓쳐 스킨을 챙기지 못했을 경우 자책감과 함께 허탈함이 어우러져 그때 1만원의 순간 체감가치는 100만원까지 상향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골프 고수들이 라운드에서 1만원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눈길를 끌었다. 당시 설문에서 핸디캡 10 이하 고수(14명)들은 90%가 넘는 12명이 20만원 이상(30만·40만원 포함)으로 답했다.

골프를 즐기는 한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내기 골프는 일반 경제학에다 기회비용과 효용이론이 적용된다고 한다. 액면가치 1만원에 기회비용이 추가되고 주관적인 요소마저 가미돼 체감가치는 훨씬 커진다는 것.

기회비용으로 계산하면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우선 10시간(차에서 보내는 시간 포함) 정도 소요되는 시간적 가치가 고려된다. 여기에다 휴일날 휴식을 포기한 대가 등 다양한 요소를 감안하면 골프 내기에서 1만원은 대략 5만~10만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막상 내기에 돌입하면 상대방과 경쟁 요소에다 실수했을 때 비교열위에 따른 자존심 상처와 허탈감 등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돼 1만원 가치는 다시 높아진다.

만약 5만원씩 거둬 20만원이 걸린 스킨스 게임에서 처음 1만원을 챙겼다면 5%에 불과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전체 상금이 작아져 같은 액면가라도 1만원의 체감가치는 또 올라간다.

골프심리학에 따르면 내기 골프 특성이 돈의 체감가치를 높인다고 한다.

골프는 보통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이 즐기는데 이들은 마이어 프리드먼의 성격 구분상 '타입A' 특성을 지닌다는 것. 최고경영자(CEO)에게 주로 해당하는 타입A는 다혈질이면서 공격적이어서 경쟁에서 지면 무척 자존심을 상해하면서 분을 못 삭인다.

반대로 타입B의 유순한 성질을 타고난 골퍼들에게는 1만원 가치는 그저 재미에 불과해 대조를 보인다.

생전에 골프를 즐겼던 이병철 삼성 회장이 1만원을 갖고 동반자들과 옥신각신했다는 우스운 일화도 바로 이런 내기 골프 심리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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