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본도 없이 무대에 선 배우

  • 허연
  • 입력 : 2018.11.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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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폰카 아포리즘-38]

#77

인생 상담을 할 겸해서 선배를 만나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찻잔에는 선명하게 'SOS'라고 써 있었고, 차를 우려내는 기구인 인퓨저 끝에는 오 헨리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잎새'가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자니 웃음이 나왔다. 우주 어디선가 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세상엔 분명 우리가 감지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에너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기야 우리가 흔히 신(神)이라고 통칭하는 존재도 결국 '방향성을 가진 에너지'가 아닌가.

오만해지지 말자. 내가 알고 감지하고 이해하는 것은 손톱보다 작고 깃털보다도 가벼운 우주의 일부일 뿐이다. 우주는 내가 모르는 에너지에 의해 굴러간다. 나는 아주 미세한 우주물질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주론자 마틴 리스의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40억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늘 의식한다면 현재의 많은 문제들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라고.

#78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대본도 없이 한 생을 살다가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우리에게 대본을 주지 않았다. 사실 세상에서 나만을 위해 특별하게 마련된 시나리오는 없다. 우리는 그저 세상의 일원으로 어떤 에너지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소멸하고, 이 생이 소멸한 다음에는 다른 물질로 바뀌어 또다시 우주라는 무대에 데뷔하는 배우일 뿐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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