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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

  • 이문영
  • 입력 : 2016.07.0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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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 민족대표.
[물밑 한국사-2] 1919년 3월 1일에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3·1 만세운동이다.

 이때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고 여기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을 했다. 그런데 이 민족 대표 33인을 비판하는 글이 인터넷에서 흔히 보인다. 보통 비판의 골자는 민족 대표가 원래 예정한 파고다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밥을 먹고 총독부에 전화해서 잡아가라고 했다는 데 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시기는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이다. 전화해서 잡아가라고 했다고 일제 헌병이 이들을 신사적으로 대접이라도 했을까?

 당시 58세였던 민족 대표 양한묵은 감옥에서 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54세의 박준승은 복역 중에 사망했다. 59세의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풀려났는 데 곧 사망했다. 31세였던 이갑성은 일제의 신문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감옥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감옥은 지옥 이상의 지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때가 양한묵이 신문 중 옥사한 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

 민족 대표는 자신들이 붙잡혀 가면 어떤 대접을 받을지 몰랐을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묵묵히 감내한 것이다.

 3·1 운동을 계획하고 무책임하게 잡혀가면 그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비판도 있다. 당연하다. 그 때문에 민족 대표들은 그 뒤를 이어갈 백업 요원들을 선발해 두었다. 이들을 합해서 민족 대표 48인(혹은 49인)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는 훗날 민족지도자로 성장하는 고하 송진우와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백업 요원도 대부분 체포되었고 그중 안세환 같은 분은 고문으로 인해 정신이상이 되어 평생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민족 대표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어이없고 몰상식한 비판이 바로 변절했다는 비판이다. 정말 많은 사람이 민족 대표 33인이 모두 변절하고 오직 만해 한용운만이 변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명인들이 쓴 책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있는데, 정말 나쁜 중상모략이다.

 33인의 민족 대표 중에 변절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오직 3명이다. 그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출옥 후에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이역만리에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기도 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민족 대표 중 가장 어렸던 31세의 김창준은 출옥 후 1925년에 함경북도 영성주재소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광복 후에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이 되는 바람에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

 민족 대표 중에는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앞장 선 남강 이승훈도 있다. 민족 대표 33인이 한용운만 빼고 다 변절했다는 이야기는 이승훈도 변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그러한가.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인쇄사 사장 이종일은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사망했고, 동학혁명에도 가담했던 최고령 민족 대표 이종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병사했다. 이종훈의 아들 이관영은 손병희의 맏사위였는데 1907년에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손자도 3·1운동에 참여했다.

 목사 신홍식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비협조한 탓에 여러 차례 투옥됐다. 이분의 손자는 가세 몰락으로 광복된 조국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천도교의 홍병기는 출옥 후에 만주로 가 고려혁명당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또 옥고를 치렀는데 그 손자는 닭튀김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고 아내가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목사 김병조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1924년부터는 만주에서 '한국독립운동사략' '대동역사' '독립혈사' 등의 역사책을 쓰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광복 후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결성하고 공산 치하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옛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일제의 신문 때 대다수 민족 대표는 독립운동을 앞으로도 계속하겠다고 말했으며 그 약속을 지켰다. 권동진은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할 것"이라고 말했고, 이승훈은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물론 일제의 압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마음 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매를 피하고자 한 발언이라는 것은 그 후의 행적이 증명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민족 대표 33인 중 변절한 사람은 딱 3명이다. 박희도, 정춘수, 최린.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년6개월 복역했다. 1922년에 필화로 체포되어 2년6개월 형을 받기도 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4년부터 변절해 내선일체와 징병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다. 1949년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지병을 이유로 불구속되었다.

 정춘수는 목사로 민족 대표가 되었고 1년6개월 형을 받았다. 1938년에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된 뒤에 전향서를 쓰고 나왔고 이후 친일행위를 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최린은 독립운동으로 3년간 복역했다. 천도교 도령까지 지낸 그는 1934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최린 때문에 천도교 안에도 친일파가 발생했으나 민족 대표 오세창은 천도교의 원로로 끝까지 친일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지도자로 남아 반민특위 현판에 '민족정기'라는 네 글자를 적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최린은 그 현판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백업 요원 중에는 두 사람이 변절했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과 중앙고보 교사로 3·1 운동에 참여한 현상윤이다.

 평생 친일파 문제를 연구한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은 책 '실록 친일파'에서 민족 대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 기미독립선언서.
"기미년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는 최린, 정춘수, 박희도의 3명이 변절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을 포함해도 그 수효는 4명이다. 나머지 30명이 절개를 온전히 지켰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30명마저 변절했다면 우리는 어디 가서 3·1의 자랑을 말하겠는가?"

 대체 누가 이 비정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분들에게 돌을 던지는가. 우리의 감사를 바쳐도 부족한 이 분들에게.

 [이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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