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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치료 불가능한 고자였다?

  • 배한철
  • 입력 : 2016.07.0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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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은 1882년 민태호의 딸 순명효황후(1872~1904), 1906년 윤택영의 딸 순정효황후(1894~1966)를 아내로 각각 맞이했지만 자식을 두지는 못했다. 순종은 성불구자였다.

육군대장복 차림의 순종 사진. 일제 통감부 시기 황실 사진사였던 이와타 카나에가 1909년경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55×40.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육군대장복 차림의 순종 사진. 일제 통감부 시기 황실 사진사였던 이와타 카나에가 1909년경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55×40.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말 학자이자 우국지사인 황현(1855~1910)의 역저 '매천야록'에는 순종이 고자(鼓子)를 타고났다고도 하며 어린 시절 궁녀가 그의 생식기를 빨아서 그렇게 됐다고도 한다고 쓰여 있다. 나이가 점점 들었지만 그의 생식기는 아주 작았고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이 흘러나와 하루에 두 번씩 바지를 갈아 입어야 했다. 혼례를 치른 지 수년이 지났지만 부부 관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명성왕후가 미쳐 날뛰었다. 명성황후는 궁녀를 시켜 성교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했다. 황후는 문 밖에서 "되느냐 안 되느냐"고 궁녀를 다그쳤고 궁녀가 "안 된다"고 답하자 주저앉아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쳤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원자가 잘되기를 비는 제사를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가며 지냈다. 하루에만 천금이나 되는 비용이 지출됐고 결국 1년이 채 못 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매천야록은 총 6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1864년(고종 1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인한 안동 김씨의 몰락, 명성황후와 대원군 간의 알력, 명성황후와 그 척족의 난정, 탐관오리의 비행, 외세의 침투, 임오군란과 청국의 간섭,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시말, 청일 전쟁의 발발, 갑오경장, 을미사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을사보호조약, 친일파의 매국행위, 국권 수호를 위한 의병활동 및 지사들의 의거 등 문호 개방 이후 일제에 의해 합병될 때까지의 국내 실상은 물론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빼놓지 않고 기록해 근대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1909년 김규진이 찍은 황현 사진. 사진 우측 상단에 "매천 55세 소영"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 15×10cm. 보물 1494호. 개인소장.
▲ 1909년 김규진이 찍은 황현 사진. 사진 우측 상단에 "매천 55세 소영"이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 15×10cm. 보물 1494호. 개인소장.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조선 말 국정을 농단한 민씨 척족의 모럴해저드를 비판하는 데 전반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유력자들 사이에서 매관매직이 성행했지만 고종마저 직접 나서 관직을 팔았다. 밀양 사람 박병인은 왕에게 35만냥을 내고 경주군수 자리를 받았다. 돈독이 오른 왕이 수령을 자주 교체한다. 임기가 너무 짧아 전을 채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관직을 사려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청나라 공사 서수봉이 고종을 알현하면서 "중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10년이 채 안 되었지만 종사가 몇 번씩 전복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 되어도 임금의 자리가 아직도 건재하다. 어찌 나라의 운수가 좋고 풍속이 아름답다하지 않겠소"라고 비꼬는데도 왕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배를 잡고 웃었다. 서수봉은 "슬프도다, 조선 백성들이여"라고 탄식했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게 시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대궐 밖에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부터 명성황후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명성황후가 불안해하자 정병하(1849~1896)는 "신에게 방비책이 있으니 조금도 의심하고 근심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정병하는 일본 측에 붙었다. 사건 당일 대궐에 숙직을 하면서 낭인들이 궐내로 침입했을 때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속여 달아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끌려나왔고 자신이 양녀로 데리고 있던 일본 여자 고무라(小村室)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다가 죽었다.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 120.7×72.8cm. 보물 1494호. 개인소장.
▲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 120.7×72.8cm. 보물 1494호. 개인소장.
 황현은 "민비가 기지가 있고 영리하며 권모술수가 풍부해 정사에 간여한 지 20년 만에 나라를 망치게 했다. 이로 인해 천고에 없었던 변을 당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이때 고종의 심정은 어땠을까. 억누를 수 없는 큰 슬픔에 젖었을 것 같지만 이 사건 이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옛 애첩을 대궐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당했던 상궁 엄씨를 명성황후가 죽은 지 불과 5일 만에 데려왔다. 엄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알고 그를 죽이려고 하자 고종의 만류로 죽음은 면했지만 출궁당했다. 그가 대궐로 들어오자 장안 사람들은 고종이 명성황후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며 모두 한스럽게 생각했다. 입궁한 엄씨는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정사에 간여해 뇌물 챙기기에 급급했으니 그 정도가 명성황후 못지않았다.

 명성황후의 친척 오빠로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였던 민겸호의 작태와 임오군란 이후 최후를 맞는 과정도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임오군란 당시 반란군들은 민겸호를 첫 번째 처단 대상으로 삼고 집을 습격했는데 창고에서 진귀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나왔다. 이를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는 불꽃에서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민겸호는 대궐로 도주했지만 곧 반란군에 붙잡힌다. 반란군을 따라 온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좀 살려주시오"라고 간청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란군이 달려들어 총칼로 민겸호를 난도질했다. 민겸호는 민씨 일파인 김보현과 함께 궁궐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졌다. 황현은 "살이 물에 불어서 하얗고 흐느적거렸으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한 이완용은 자신의 가정도 파탄에 이르게 했다. 그는 며느리와 간통했다.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는 정미칠적(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7인) 중 한 명인 임선준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이명구가 일본 유학을 간 사이 이완용은 며느리 임씨를 겁탈했다. 귀국한 이명구가 내실에 들어갔다가 이완용과 자신의 부인이 함께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살아서 뭣하겠는가"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완용은 그후 세간의 지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며느리를 첩으로 삼았다.

 당하는 자는 늘 힘없는 백성이고 그중에서도 아이들 희생이 크다. 고종 19년(1882년) 청나라 사람들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병 왔다가 장안에 걸식하던 어린이들을 붙잡아 중국에 팔아넘겼는데 그 수가 1년 만에 수천, 수만이나 됐다. 황현은 "서양사람들은 영아원을 설치해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며 기른다고 빙자했지만 1대대를 편성해 선척에 가득 싣고 떠나갔다"며 "이것은 청국인에 비해 거의 갑절이나 됐다"고 고발했다.

▶황현(1855~1910)=호는 매천(梅泉)이며 1885년(고종 22년)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했으나 과거장의 폐해를 목격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전남 구례로 낙향해 은거했다. 그러면서도 강위 등 서울의 개화사상가들과도 다양하게 교유했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병합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4편의 절명시를 남긴 뒤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고 자결했다. 1911년 영호남 선비들이 성금을 모아 '매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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