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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 황희' 진실일까, 조선왕조실록 찾아보니

  • 이문영
  • 입력 : 2016.08.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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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 한국사-7] 황희가 알고 보면 청렴한 청백리가 아니었고, 탐관오리였다는 이야기가 간혹 인터넷에 떠돈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일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새삼 발굴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정말 그럴까? 하나하나 살펴보자.

황희
▲ 황희
 황희가 설우라는 승려의 뇌물을 받아먹어서 '황금대사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뇌물을 주었다는 설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세종대왕 때의 승려로 나름대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장원급제한 조말생의 형제였다.

 세종대왕이 조계종에 있던 금그릇, 은그릇을 녹여 금괴, 은괴로 만들고 나라에 바치게 하였는데 이때 설우가 금괴, 은괴를 빼돌렸다가 들통이 났다. 당연히 엄벌을 받아야 할 일이었는데도 설우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설우의 형제였던 조종생이 설우를 빼버리고 임금의 재가를 받아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때 빼돌린 금괴, 은괴 중 일부가 뇌물로 사용되었고, 황희도 이것을 받았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진짜로 적혀 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건 당시의 기록에는 안 나오고 훨씬 나중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황금대사헌이라고 비난한 글은 세종 10년 6월 기사에 나온다. 설우의 금괴 사건은 세종8년 3월의 일이었다. 뇌물 사건 때 대사헌이었던 황희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때 황희는 대사헌도 아니었다. 황희는 당시 의정부 찬성사에 있었다.

 설우의 형제였던 조말생은 뇌물을 받아먹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다. 그후에도 조말생은 끊임없이 뇌물 문제로 거론되는데, 왜 황희에게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황희에 대한 혐의에는 축재도 있다. 원래 재산이 별로 없었는데, 매관매직하고 형량을 깎아주면서 축재하여 재산을 일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실록에 나와 있다.

 이뿐이 아니다. 간통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박포라는 인물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다.

 박포의 아내가 종과 간통을 했는데, 이걸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었다. 박포의 아내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 우무머리 종을 죽여서 연못에 수장시켜 버렸다. 시체가 결국 떠올라 관아에서 수사에 나서자 살인한 사실이 들통 날까 두려워진 박포의 아내는 서울로 달아나서 황희네 집 마당 북쪽의 토굴 속에 숨었다. 이때 황희가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다. 박포의 아내는 토굴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결국 살인사건이 유야무야 끝나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말이다.

 막장 드라마 스토리 같은 이야기이다. 박포는 1400년(정종 2년)에 제2차 왕자의 난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인물로 이런 이야기에 명예훼손을 걸 수 없다. 따라서 안전한 인물을 내세워 만들어낸 소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 멀쩡한 사료를 소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가? 이 이야기들은 '멀쩡한 사료'가 아니다.

 위 세 가지 건은 상당히 중죄, 아니 절대 영의정 같은 고위직이 해서는 안 될 수준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황희 정승이라면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세종실록
▲ 세종실록
 그런데,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진실이 아닐 정황도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위 세 가지 사실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것도 한꺼번에.

 위 내용은 모두 사관 이호문이 쓴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졸아가지고 논란을 빚기도 했고 그저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지방 관리를 곤장을 쳤다가 파직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세종 28년 9월의 일이다.

 이천부사로 있으면서 이웃 고을의 관기를 불러와 수청을 들게 하고 이웃 고을의 처녀를 데려와 희롱하다가 욕을 먹었는데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관비와 간통하고 관청의 곡식을 횡령하여 결국 사헌부에 걸려 파직되고 만 것이다. 이때 영의정이 황희였다.

 국왕이 승하한 뒤에 그 국왕 시에 작성한 기록들을 모아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 기록을 가리켜 '사초'라고 부른다. 사초는 사관들이 써서 보관하고 있다가 실록을 편찬하게 될 때 제출하는 것이다.

 이호문도 사관이었으니 사초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바로 황희에 대한 비난이 저렇게 들어 있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편수관들이 황희와 같이 일했던 사람인만큼 이 기록이 문제가 되었다. 본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으니 말이다. 아홉 명의 편수관이 모여 "이런 일이 없었는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박포 아내의 일은 규중의 일이라 모를 수도 있다 치더라도, 황희의 재산은 뻔한 것이고 황희가 매관매직에 형량 장사를 했다면 우리가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특히 이호문의 친척인 허후(허후는 허조의 아들인데, 허조는 이호문을 망신준 적이 있다)는 이호문이 조급하고 망령되며 단정치 못한 사람이라 이 내용은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호문은 황희 다음 대사헌이었던 김익정도 설우의 뇌물을 받았다고 써놓았는데, 이에 대해서 편수관의 한 명이었던 김종서가 그럴 리가 없다고 혀를 찼다. 당시 뇌물로 파직된 조말생의 아들은 김익정도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고발했는데, 이미 그 당시에 무고라는 게 밝혀졌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가지고도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더 결정적인 증언을 찾을 수 있다.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의 발언이다.

 이호문의 사초는 오래 전에 쓰인 것이라 당연히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는데 유독 황희를 비난한 사초만이 깨끗한 흰 종이에 씌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초를 제출할 때 새로 써서 넘긴 것이거나, 파직 당하고 분한 마음에 새로 써서 넣어두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삼문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이런 모함 글을 실록에 적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관의 글은 잘못 되었다 해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이호문이 이처럼 사사로운 감정으로 비난의 글을 남겨 놓았는데, 후대에 와서는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알고 보니 황희는 '황금대사헌'이라 불리는 파렴치한이었대"라고 욕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니, 이호문의 복수는 어떤 면에선 성공한 셈이라 하겠다.

 [이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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