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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탄핵 대통령

  • 이문영
  • 입력 : 2017.03.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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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최초로 탄핵 당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진=한국사진사연구소
▲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최초로 탄핵 당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진=한국사진사연구소
[물밑 한국사-39]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 되었다. 첫 번째가 아닌 이유는 당연히 먼저 탄핵된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4·19 때 이야기가 아니다. 임시정부 시절 이야기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의 결과로 탄생했다. 임시정부는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만든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세 사람을 놓고 투표를 하여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임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한성정부라 하는 임시정부가 계획되었다. 그리고 이 한성정부에서도 이승만이 최고직인 집정관 총재에 추대되었다.

 한성정부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추대 소식이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거의 동시에 도착했고 이승만은 그 후 대통령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도산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은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한성정부와 임시정부가 둘 다 존재하는 것은 문제라 생각하여 하나의 조직으로 바꾸기로 하면서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1919년 9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헌법도 꼴을 갖추어 만들어졌다.

1919년 10월 11일 촬영한 임시정부의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이 앉아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 1919년 10월 11일 촬영한 임시정부의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이 앉아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렇게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20년 12월이 되어서야 상하이로 왔다. 대통령직은 실제로는 계속 비어 있는 셈이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추대될 때부터 잡음이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3·1 운동이 있기 직전인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청원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해방하기 위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죽기를 각오하며 청원합니다."

 이런 와중에 임시정부 측은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하기로 했으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쪽에서는 극력 반발했다. 신채호는 "이승만은 위임통치와 자치문제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며 이승만을 비난했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뽑히게 되었고 신채호 등 무장독립투쟁을 원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임정에서 이탈했다. 이 위임통치 청원 때문에 이승만은 출발부터 폭탄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 당시 위임통치 안은 이승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외교를 통해 독립을 갖추자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사고가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자 한 김규식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다. 안창호 역시 3·1 운동 이전에는 위임통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하와이에서부터 이승만과 대립했던 박용만이었다. 1919년 8월 29일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태평양시사의 주필 조용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건을 격렬한 어조로 비난했는데, 조용하도 박용만 계열의 사람이었다.

 "위임통치청원서, 곧 조선이 미국 식민지로 되어지이다 하는 요구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여 매국 매족의 행위를 감행하였도다. 독립이란 곳에서 뒤로 물러섰던 매국적 이완용이 되거나, 합병론자의 송병준이 되거나, 자치운동자의 민원식이 되어 나라를 그리치는 요물이 발작하리니 독립의 큰 목표를 위하여 이승만과 정한경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방관자의 안중에는 조선이 이미 멸망하였다 할지라도 조선인의 심중에는 영원 독립의 조선이 있어 일본뿐 아니라 곧 세계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우리 조선에 향하여 무례를 가하거든 칼로나 총으로나 아니면 적수공권으로라도 혈전함이 조선민족의 정신이라."

 이승만이 드디어 상하이에 나타나자 이승만에 대한 공격은 더욱 타오르게 되었다. 1921년 1월 5일 국무총리 이동휘는 위임청원 문제를 따져 들었다. 이동휘는 24일 사퇴하고 말았다. 이승만에게 물러나라는 압력이 거세어지기 시작했지만 이승만은 탄핵을 하라고 말하며 버텼다. 뿐만아니라 만주의 무장 투쟁과 의열단 투쟁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3월 26일에 독립신문 제100호 특집으로 인터뷰를 하면서 위임청원 문제를 정한경에게 떠미는 발언을 했다. 정한경은 이에 반발해서 당시 상황을 폭로하고 나섰다.

 안창호와 김규식도 임정에서 사퇴해버려 당시 정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 도달하자 이승만은 정국 수습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임시정부는 대통령이 없는 상태에서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면서 이렇다 할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1924년 6월에 이르러서야 대통령 유고 상황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이동녕과 박은식이 차례로 대통령 대리를 맡아 정국을 수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 3월 11일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이승만의 발목을 계속 잡은 것은 위임청원 문제였으나 탄핵된 이유는 위임청원 때문이 아니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난맥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대처에서 악수를 거듭 두었기 때문에 탄핵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여 직무지를 떠나 5년이나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성의를 보이지 않은 점과 엉터리 사실을 만들어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어지럽힌 점, 정부의 행정과 국고 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을 모욕한 점,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한 점으로 인하여 탄핵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동포 사회에서 독립자금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대통령 유고안이 결정되자 이 송금을 중단시켰다. 이승만은 크게 반발하면서 임정을 비난하고 의정원의 결정을 부정했다. 이렇게 이승만은 임시헌법을 위배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승만은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으로부터 이런 판결을 받았다.

 "주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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