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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No, Sir !" 용감한 미국 공무원들

  • 안정훈
  • 입력 : 2017.06.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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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 /사진=AP연합뉴스
▲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 /사진=AP연합뉴스
[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28] 1973년 10월 20일.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맡은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가 대통령에 의해 직접 해임된 날이다. '토요일 밤의 학살'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특검 해임을 명령했으나 리처드슨 장관은 이를 거부하며 사임했다. 그러자 닉슨 대통령은 윌리엄 러클샤우스 부장관에게 다시 해임 명령을 내렸으나 러클샤우스 부장관 역시 이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닉슨 대통령은 로버트 보크 송무차관까지 내려가 연방대법관 자리를 약속해주고 나서야 간신히 특검을 해임시킬 수 있었다.

'토요일 밤의 학살'이 있은 지 며칠 뒤 여론조사에서 닉슨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한다는 응답(44%)이 처음으로 반대 응답(43%)을 앞질렀다. 닉슨 대통령은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고 상원 표결을 앞둔 1974년 8월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40여 년이 지난 후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월요일 밤의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지난 1월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은 연방법원에 제기된 반이민 행정명령 효력 중지 소송 등에 정부 측 변론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법무부 소속 변호사들에게도 행정명령에 대한 변론을 금지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예이츠 대행은 법무부 변호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행정명령의 적법성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고 이러한 행정명령을 변론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이날 오후 9시쯤 예이츠 대행을 경질한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를 수행한 이래 사임까지 각오한 미국 공무원들의 소신이 돋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관리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의사에 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말단 공무원들도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미국 공무원들의 신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트럼프의 사람들'조차 트럼프 대통령의 의사에 반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모습은 상명하복식 소통에 익숙한 한국에선 생경한 풍경이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은 내정자 시절인 지난 1월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러시아를 미국의 주요 위협으로 규정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친러 스탠스와 거리를 뒀다.

장관 취임 뒤에는 국방부 인사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기싸움을 벌였다. 부장관 후보로 매티스 장관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가 국방장관 1순위로 꼽았던 미셸 플러노이를 추천했다. 반면 트럼프 캠프에서 활동했던 미라 리카델 등에 대해선 퇴짜를 놓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백악관이 매티스 장관이 점찍은 인사에 대해 질색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패트릭 샤나한 보잉사 부사장이 부장관에 임명됐지만, 매티스 장관은 꺾이지 않는 군인정신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들었다.

초강경 이민정책을 주도해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으로 평가되는 제프 세션스 법무부 장관도 내정자 신분일 때 청문회에 출석해 "대통령이 도를 넘으면 과감히 '노'라고 말하겠다"고 밝혔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부활시키려던 물고문의 일종인 '워터보딩'도 반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도리어 입장을 굽히게 만들어냈다.

트럼프 정권의 '러시아 스캔들' 의혹을 수사 지휘하다가 해임된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소신을 지키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항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코미 전 국장은 지난 1월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 독대를 앞두고 수사 개입 여지를 차단하려 행사장 뒤편에 쳐진 커튼과 비슷한 색의 정장을 입고 '회피 훈련'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청문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형 질문을 상정한 뒤 거기에 답변하는 훈련을 했다는 후문이다.

코미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러시아 내통 의혹을 받고 있는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를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코미 전 국장은 독대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자신의 차로 달려가 대화 내용을 적었고, 이것이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의 궁지로 몰아넣은 '코미 메모'가 됐다.

고위직 인사들만 대통령에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월간지 애틀랜틱에 따르면 수많은 미국 연방 공무원들이 자신의 소신과 다른 대통령 앞에 사표를 낼 것인지, 현직에서 저항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애틀랜틱이 인용한 한 국무부 여성직원은 "(내가 떠나면) 미친 자들만 남을 것인데, 그들에게 내가 하던 일을 맡길 순 없다. 달아나지 말고 남자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국가안보 관련 관리들은 물고문, 무차별 사찰 등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이 부활할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 던질 수 있도록 사표를 써 다닌다고 전했다.

[안정훈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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