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프리미엄스페셜리포트

능지처참된 죄인의 시신 구워먹은 중국인 장수

  • 배한철
  • 입력 : 2017.07.17 06:0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1] 이상주의적 개혁주의자 조광조(1482~1519)는 용모와 안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는 스스로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얼굴이 어찌 남자로서 복이 있는 상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악학궤범을 편찬한 음악가이자 용재총화의 저자이기도 한 성현(1439∼1504)은 그와 반대로 풍채가 보잘것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람좌객(御覽坐客)이라고 불렀다. 좌객은 기생집에 갈 때 자신의 외모가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함께 데려가는 추한 외모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람좌객은 자신을 임금의 눈에 더 잘 띠게 함께 왕을 알현하는 사람인 셈이다. 독서광이었던 성현은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심지어 잠잘 때도 책을 머리에 배고 잤다. 그의 몸에는 이가 많았으며 이를 잡으면 습관적으로 갈피에 끼워뒀다. 후대 사람들이 그의 자손들에게서 책을 빌려 보면 항상 말라 비틀어진 이가 책 사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윤복 작 연당의 여인. 어유야담은 상류층에서 기생, 승려,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인간삶을 기록하고 있다.
▲ 신윤복 작 연당의 여인. 어유야담은 상류층에서 기생, 승려,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인간삶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어우야담의 한 부분이다. 어우야담은 조선 광해군 때 문인 유몽인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5권 1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왕실, 사대부 등 상류층에서 상인, 승려, 천민, 기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의 삶은 물론 시문, 종교, 귀신, 풍속, 성 등 방대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게 기록하고 있다.

계유정난의 주역 한명회(1415~1487)는 성격이 잔인했다. 부하들이나 노복들이 죄를 지으면 기둥에 묶어 놓고 활을 쏘았다. 술에 취해 활을 쏘다가 조는 틈에 죄인이 밧줄을 풀고 도망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정강이뼈가 아픈 병을 앓았는데 통증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종에게 바위로 정강이를 부러뜨리도록 했다. 주저하는 종을 향해 활을 잡아 쏘려고 하자 종은 어쩔 수 없어 돌을 들어 정강이 위에 내려쳤다. 한명회는 결국 이 일로 죽었다.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 제조를 맡아 연산군의 충복 역할을 했던 구수영(1456~1523)은 뜻하지 않게 중종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된다. 그에게는 구현휘라는 서자가 있었다. 동대문 밖에 있는 훈련원 근처 술집에서 기생을 끼고 잠들었는데 주위가 요란스러워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높은 벼슬아치들과 군졸들이 모여 있었다. 벼슬아치들은 반정을 모의하면서 왕의 심복인 구수영부터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현휘는 뛰쳐나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소인의 부친은 여러 대감들이 거사를 일으키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오려고 했지만 곽란이 일어나 대신 저를 보내 먼저 의거에 참여하라고 일렀다"고 고했다. 반군들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했고 거사 뒤 구수영과 그의 서자 구현휘 모두 큰 상을 받았다. 구수영은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지만 서자의 기지 덕분에 목숨도 구했고 공신까지 하사받았다.

왕족이면서도 생계를 위해 신발을 만들었다가 조선 제일의 장인이 된 이옥견의 사연도 소개한다. 이옥견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한남군의 손자이다. 한남군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죽으면서 그의 집안이 몰락했다. 이옥견은 살길이 막막하게 되자 신분을 내던지고 이웃의 장인에게서 신발 만드는 법을 배웠다. 손재주가 좋아 금방 최고의 장인이 됐다. 기생들에게 예쁜 신을 사주려는 명문가 자제들의 발길이 쇄도했다. 기생들은 "이옥견이 만든 것이 최고"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솜씨는 급기야 대궐에까지 알려져 벼슬도 받고 조부의 관작도 회복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유명한 노비 반석평의 일화도 있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이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으며 반씨 성의 부잣집에 입양시켰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상집은 재상이 죽은 뒤 몰락한다.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나자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실토하면서 처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의롭게 여겨 후하게 장려하고 국법도 파기했다. 유몽인은 "우리나라의 인재는 중국의 천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데도 벼슬을 못하게 견고하게 막으니 사대부들이 편협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라고 논했다.

책에는 관리들과 기생들의 애정사가 유난히 많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대문장가였지만 조광조 등 신진사림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남곤(1471~1527)은 관찰사 시절 만난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남곤은 자신의 집에 가자는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관사를 벗어났다. 기녀는 어미를 시켜 고을 수령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술상을 마련해 남곤을 대접했다. 남곤이 잠이 들자 기녀는 창문을 모두 막아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남곤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일개 기생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해 점심 때가 다 되도록 잠에 빠졌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감영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병을 핑계로 서울로 도망가버렸다.

수령은 기생을 남곤에게 보냈다. 그녀를 잊지 못했던 남곤은 따로 집을 얻어 첩으로 들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그녀 집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잘 생긴 사내가 뒷문으로 도망쳤다. 남곤은 "뒷문으로 나간 저 손님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그녀는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며 "저를 벌을 줘도 좋지만 손님이라니 이 무슨 말씀인가요"라고 대꾸했다. 정신을 차린 남곤은 "창기가 두 마음을 가지는 것은 책망할 일이 아니다"라며 다음날 기녀를 말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중종 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김안로의 아들인 김시(1524~1593)는 아버지가 사사된 후 벼슬길이 막히자 화가의 길을 걸었다. 산수, 인물, 우마, 화조, 조충 등 여러 분야의 화화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해 윤두서가 그를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대머리였다. 늘그막에 홍주(홍성)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홍주 수령은 나이 어린 기생을 특별히 뽑아 그를 모시게 했다. 다음날 우두머리 기생에게 "어제 그 아이가 늙은 중과 정을 통한다는 데 사실이냐"고 따졌다. 행수기생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발끈했고 어린 기생은 "억울하다"며 눈물까지 떨궜다. 그제서야 김시는 관을 벗고 머리를 보여주며 "내가 바로 그 중이니라"고 놀려댔다.

여러 대식가도 언급한다. 중종의 재종 외삼촌인 김계우는 매월 소 여섯 마리를 잡아 먹었다. 그는 부인과 더불어 큰 은쟁반에 잘 삶은 소고기를 저며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배부르게 먹었다. 김계우는 중종이 잠저에 머물 때 가르쳤으며 평생 임금이 깍듯이 모셨다. 부부는 각각 80세까지 살고 죽었다. 병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응두(1508~1572)도 먹성이 좋았다. 노인이 술과 안주, 홍시 200개 등 여러 날을 먹을 많은 양의 음식을 그에게 바쳤다. 정응두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술과 음식을 싹 비우고 홍시까지 입에 모두 털어넣었다. 노인은 "대감이 한자리에서 다 드실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조선의 의복은 소매가 넓고 여러옷을 겹겹히 입어 중국인들의 놀림을 샀다. 그림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의복제도를 엿볼수 있는 서직수 초상.
▲ 조선의 의복은 소매가 넓고 여러옷을 겹겹히 입어 중국인들의 놀림을 샀다. 그림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의복제도를 엿볼수 있는 서직수 초상.
당대 풍속도도 매우 생생하게 묘사된다. 우리나라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두루마기를 겹겹이 입어 활동하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반면 중국은 폭이 좁은 실용적인 옷을 입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 온 명나라 군대가 품이 넓고 넉넉한 우리나라 옷을 보고 비웃으면서 모욕을 줬다. 우리 조정에서도 이 같은 의복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기가 적합치 않아 차제에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의복제도를 고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제독 이여송이 "조선의 의복이 옛날 제도에 가까운데 무슨 이유로 지금의 중국을 본받아 고치려 하느냐"고 제지했다. 옛날 제도는 당나라의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 당나라 예법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그 기본틀이 조선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과 만날 때면 차를 마셔야 하는데 이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차 마시기를 좋아해 한자리에서 일곱 주발은 거뜬히 비운다. 유몽인이 중국인 통역관 왕군영을 만나 차를 대접받았다. 한두 주발을 마시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러나 서너 사발을 넘어서자 감당해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수액(水厄, 물로 인한 재액)과 다름없다고 유몽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진귀한 송이는 산 속 승려들의 독차지였다. 매년 가을이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송이버섯을 채취해 밀가루에 갠 기름장을 발라 구워먹었다. 유몽인은 그 맛이 천하의 진미라고 극찬했다. 승려들은 무리를 지어 송이를 채취해 집채만큼씩 쌓아 둔 곳이 여러 곳이라고 전했다.

선조때 공조판서를 지낸 이충원 공신초상. 그는 중국인 장수의 강권으로 인육을 먹었다고 어우야담은 전한다.
▲ 선조때 공조판서를 지낸 이충원 공신초상. 그는 중국인 장수의 강권으로 인육을 먹었다고 어우야담은 전한다.
중국인들은 거리낌없이 인육을 먹었다. 임진왜란의 혼란기를 틈 타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송유진은 능지처참된 뒤 신체가 5등분돼 전국에 돌려졌다. 마침 서울에 와 있던 중국 장수가 그 인육을 얻어 구운 뒤 한 그릇을 싹 비웠다. 그러면서 "중국인은 이것을 먹기를 꺼리지 않는다"며 그를 대접하던 이충원(1537~1605)에게도 먹기를 권했다. 이충원은 어쩔 수 없이 저민 고기 한 점을 먹었다. 임진왜란 때는 기근이 극심해 식인 행위가 만연했다. 개성의 한 백성이 한 살배기 아이를 길가에 놓고 잠시 쉬는 사이 두 사람이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니 아이는 이미 끓는 물 속에서 푹 삶아져 죽어 있었다. 범인들을 묶어 관아로 가 실상을 아뢰었다. 죄인들이 자백을 하지 않자 죽은 아이를 증거로 제시하려고 찾으니 어찌된 일인지 뼈만 남아 있었다. 나졸들이 배가 고파 죽음을 무릎쓰고 아이를 먹었던 것이다.

▶유몽인(1559∼1623)=호는 어우당. 1589년(선조 22)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했으며 세자의 분조(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했다. 도승지, 대사간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조정의 명을 받아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다. 하지만 그해 7월 광해군 복위 음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고 아들과 함께 사사됐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