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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유물조작 의혹 받는 세키노 다다시는 누구일까

  • 이문영
  • 입력 : 2017.07.1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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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 한국사-56] 유사역사학의 낙랑군에 대한 주장 중에는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1868~1935) 도쿄제대 교수의 행적에 대한 것이 있다. 세키노가 중국에 가서 구입한 유물을 평양에서 발굴 되었다고 하는 한나라 유물과 낙랑군 유물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면 일본은 원래 고고학 유물을 땅에 파묻었다가 찾아낸 척하는데 도가 튼 나라 아니냐는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그 사건을 일으킨 후지무라 신이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 그는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한 아마추어, 즉 재야 고고학자였다. 그의 조작 행위를 밝혀낸 곳은 일본고고학회다. 일본고고학회는 그가 참여했던 발굴 유적을 전부 재검토했고 조작 사항을 남김 없이 밝혀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키노 다다시의 수집품을 포함하여 열었던 전시회 포스터.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키노 다다시의 수집품을 포함하여 열었던 전시회 포스터.
그런데 우리는 낙랑 유물을 조작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이의 조작 사실을 100년이 다 되어가도록 밝혀내지 못하고 있단 말인데,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 논문 한 편으로 의문점을 모두 풀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태희 학예연구사가 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중국 문화재 수집'이다. 이 논문은 2014년 10월 28일부터 2015년 1월 1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특별전 <동양을 수집하다-일제강점기 아시아 문화재의 수집과 전시> 도록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잠깐만! 전시회도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뿐만 아니라 이왕가박물관·미술관이 수집한 아시아 지역 문화재 약 1600건을 가지고 있다. 전시회만 연 것이 아니라 국제학술대회도 개최했다. 이 논문은 바로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이다.

유사역사학을 역사학이 아닌 사이비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직접 조사하지도 않고, 선행 연구를 찾아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상상한 결론에 맞추기 위해 증거들을 수집하여 선전선동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청동허리띠 장식(銅大帶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키노 다다시의 수집품 중 하나. (본관6576) 세키노는 한대 유물로 보았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물품으로 재분류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 청동허리띠 장식(銅大帶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키노 다다시의 수집품 중 하나. (본관6576) 세키노는 한대 유물로 보았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물품으로 재분류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럼 논란의 세키노 다다시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고 가자.

세키노 다다시는 1868년 생으로 1895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공부대학 조가학과(건축학과)를 졸업했다. 1896년 일본의 옛 수도였던 나라의 고건축을 조사하면서 고건축 전문가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01년 도쿄제대의 조교수를 거쳐 1910년 정교수가 되었고 공학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1902년에 처음 조선에 방문했고, 1909년에는 대한제국 통감부 촉탁으로 고건축 조사를 했다. 강제 병합 뒤인 1916년에 고적조사위원 및 박물관협의원으로 활동하며 식민지 문화정책에 깊이 개입하였다.

총독부는 1918년 3월 세키노에게 중국에서 물품을 수집하게 했다. 그것도 '중국에서 조선 및 내지 유물과 관계있는 물품을 수집하는 임무'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이야기한 대로라고 좋아하는 분이 있다면 글을 다시 한번 천천히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조선 및 내지'라고 되어 있다. 내지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낙랑군 유물을 위조하라고 했다고 말했는데 일본과 관계있는 물품을 수집하라고 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세키노는 대략 1918년 3월부터 9월까지 중국에 있으면서 유물을 수집했다. 그 후에는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동했다. 그가 수집한 물품은 모두 물품청구서에 기재되어 있다. 물품청구서는 물품 수령을 증빙하는 문서로, 총무국 물품출납 담당에게 교부받게 되어 있다. 수령 부서, 품명, 수량, 용도, 수령 일자 및 출납부 등록일자를 기록하고 수령 부서 부서장 및 담당자, 물품출납명령관, 물품회계관리가 날인해야 한다. 세키노가 구입한 물품의 인수일자는 1919년 6월 4일이다. 이리하여 세키노는 총 136건 268점의 문화재를 구입하고 3616.302원을 썼다. 전 단위 이하까지 철저하게 기록을 해놓았다. 세키노는 일기를 작성해서 베이징에서 며칠에 어디서 물건을 구입했는지, 동행한 사람은 누구인지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앞으로 날조를 자행할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다.

세키노의 유물 수집은 주로 한나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18년 3월 20일 : 류리창의 골동점을 돌아보고 총독부박물관을 위해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원에 구매했다.

1918년 3월 22일 : 류리창의 골동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품이 많았는데, 낙랑 유적에서 출토된 물건 같은 종류는 대개 다 있었다. 나는 수집에 최선을 다했다.

곡봉형 띠고리(청동곡봉형대구).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고분 9호분 출토품. (K번-00642-000) 이와 같이 세키노가 수집한 물품과 낙랑 유물은 당연하게도 분리하여 정리되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 곡봉형 띠고리(청동곡봉형대구).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고분 9호분 출토품. (K번-00642-000) 이와 같이 세키노가 수집한 물품과 낙랑 유물은 당연하게도 분리하여 정리되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세키노는 낙랑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한나라 유물과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다. 낙랑 유적이 한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1929년에 일어난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키노는 야마나카 사다지로라는 사람이 소유한 한대 유물인 수정감입사엽금구를 보고 그것이 낙랑 유물과 흡사하다는 점을 알고는 조선총독부에 구입하라고 요청했다. 조선총독부가 500원을 내고 그것을 사겠다고 하자 야마나카는 그 유물을 기증했다.

그럼 이런 유물들이 과연 낙랑 유물로 탈바꿈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런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수정감입사엽금구는 국립중앙박물관 본관10621번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 물론 세키노 다다시가 구입한 중국 문화재는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등록되어 있다. 유물등록번호 본관6567부터 6702번까지이다. 모든 명칭까지 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니 제발 모르는 게 있으면 논문부터 찾아보자.

유사역사학에서는 세키노가 돈이 얼마나 많아서 이런 유물들을 마구 사들였냐고 말한다. 그 돈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세키노의 유물 구매는 본인의 일기, 물품청구서, 물품 목록, 남아 있는 실물에 의해서 다 정리되어 있다. 이런 걸 모르니까 세키노가 뭘 하고 다녔는지 알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의 망상에 꿰어 맞춘 뒤에 선전선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키노는 낙랑을 한국사의 시발점으로 생각했다. 한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여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바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론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낙랑군의 유적에서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된 고유 문물이 나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타율성론은 설 자리가 없는 구시대의 이론일 뿐이다.

세키노가 식민사관을 만들기 위해 저질렀던 짓이 이제는 유사역사가에 의해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라는 사기극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기극은 없었다. 사기극이 있었다고 소리치는 유사역사가들의 불성실함만이 있을 뿐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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