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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으로 병드는 미국 제약회사들의 로비 때문?

  • 안정훈
  • 입력 : 2017.09.0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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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성 진통제
▲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의 일종인 하이드로코돈 /사진=플리커
[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6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0일(현지시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북핵 때문이 아니다.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자국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마약' 때문이다.

미국엔 이미 자국이 비상식적 수준으로 마약이 오남용되는 '마약의 나라'가 됐다는 인식이 파다하다. 톰 프라이스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8월 8일 "양키스나 다저스 스타디움 규모의 사람들이 매년 죽어간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연방질병통제센터(CDC) 산하 국립보건통계센터(NCHS)가 발표한 미국인의 마약 오남용 실태는 충격적이다. 마약성 약물 남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지난 2015년 5만2404명에 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하루에 평균 144명의 미국인이 마약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는 총 2996명이 사망했던 9·11 테러 사태가 3주마다 한 번씩 발생하고 있는 것과 같다.

미국인들의 마약 중독 증상은 비극적이다. 길거리 마약보다 의사가 처방하는 '마약성 약물'이 미국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 선언 당시 "오피오이드(opioid) 위기가 국가비상사태를 맞았다"고 말한 바 있다. 오피오이드란 마약성 진통제의 일종으로 의사 처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의약품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 약의 처방이 너무나 쉽고 많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오피오이드는 모르핀을 포함해 옥시코돈, 하이드로코돈, 펜타닐, 메타돈 등 여러 가지 상표명으로 광범위하게 판매되고 있다. 기존 진통제가 효과가 없다는 수술환자의 진술만으로도 처방이 가능한 탓에 시민들이 무분별하게 마약 성분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CDC에 따르면 지난 2012년 한 해 동안 1차 의료기관에서 발급한 오피오이드 처방전은 2억5900만장에 달한다. 1999년과 비교해 무려 300%나 증가한 수치다. 미국 인구가 약 3억2000만명이니 단순 계산으로 전체 미국 인구 중 80%가 처방전을 1장씩 받아봤다는 얘기가 된다.

NCHS의 통계를 보면 오피오이드 중독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전체 마약중독 사망자 5만2404명 중 60%인 3만3000건이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집계됐다.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25%보다 훨씬 많다.

과거 오피오이드는 큰 수술을 받은 환자나 말기암 환자 등 중증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처방됐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제약 기업 퍼듀 파마(Purdue Pharma)가 오피오이드를 복용할 수 있는 환자 범위를 넓히면서 대중적으로 처방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로비의 힘이 있었다. AP통신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제약 회사들은 8억8000만 달러를 연방정부 공무원들과 정가에 뿌렸는데 이는 강력하기로 소문난 총기 관련 로비 자금의 8배였다. 오피오이드 처방에 제약을 가하자는 단체들이 쓴 금액과 비교해선 무려 200배에 달했다.

의사들의 무분별한 처방도 화를 키웠다. 지난 6월 뉴욕에선 한 의사가 2012~2017년 5년간 1400개의 처방전을 통해 220만개의 오피오이드를 환자들에게 처방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CDC는 2014년 기준 마약성 진통제로 사망한 미국 인구가 2000년에 비해 370% 증가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피오이드 통제에 나섰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 정부가 진통제를 규제하기 시작하자 이미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오히려 불법 경로를 통해 헤로인 등을 구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적 유통 과정에서 헤로인보다 몇 배나 더 중독 증상이 강력한 펜타닐 등에도 노출되면서 상황이 더 악화하는 경우도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문화를 소개하는 인기 미국 유튜버 '올리버쌤'은 이에 대해 "로비스트 앞에 무능한 정부, 돈만 좇는 제약 회사, 불법 마약을 파는 카르텔이 만든 비극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병들고 죽어간다"고 말했다.

[안정훈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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