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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이 터진 뒤 손목시계가 확산된 까닭

  • 남보람
  • 입력 : 2017.10.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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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9] 유럽 문물 전반이 최고조로 성숙하여 사람들이 '벨 에포크(belle epoque·좋았던 시절)'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다. 이 좋았던 시절은 1800년대 중반 어디쯤에서 시작해 정확히 1914년에 끝났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문물의 발전과 함께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동시성(simultaneity)'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경험했다. 전자통신, 철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이 확산되면서 현재(the present time), 속도, 형태, 거리에 대한 서구사회의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새로운 관념, 경험, 문물이 시민사회 속으로 빨리 퍼지는 데 기여한 것 중 하나는 휴대용 시계의 보급이었다.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주머니에서 꺼내는 고풍스러운 회중시계가 19세기 신사의 상징이 되면서 휴대용 시계는 성인 남성의 필수품이 됐다. 오늘날 졸업선물로 만년필을 주는 것처럼 뒷면에 가문의 표식이나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회중시계를 사슴가죽 주머니에 넣어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문물 전반이 최고조로 성숙한 것과 비례해 아이러니하게도 갈등과 분쟁도 잦아졌다. 발칸과 세르비아에는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긴장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준비하는 각국 군대에서는 벨 에포크를 있게 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군대 안으로 옮겨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동시성 개념에 기반한 전쟁·전투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이 쏟아져 나와 전쟁수행 방식과 군사작전 활동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1870년대 프러시아는 병력 동원과 부대 이동을 위한 철도 시간표 작성을 장교 교육의 핵심 과목으로 편성했다. 1890년 몰트케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세계표준시를 도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1914년의 전장에서는 상당히 이채로운 광경이 목도되곤 했는데 그것은 시간을 맞춘 손목시계를 전투 시작 전에 나눠주는 것이었다. 어디서 언제 날아오는 총탄에 의해 생이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목의 작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1916년 7월 1일 아침, 프랑스 북부 솜(Somme)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오전 7시가 되자 수백 명의 소대장들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사전에 계획된 대로 오전 7시 30분에 호루라기를 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분침이 정확히 30분을 가리키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제히 참호에서 나온 영국 제3군, 제4군 병사들은 독일군이 방어하고 있는 곳을 향해 그들의 교범에 적힌 대로 똑바로 선 채 서서히 전진해 나갔다. 그리고 참호에서 나온 군인 대부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손목시계 광고. /출처=위키피디아
▲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손목시계 광고. /출처=위키피디아
한편 이 손목시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남성이 착용하기에는 낯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계획과 시간계획을 중심으로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작전을 추구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손목시계는 지도나 나침반만큼이나 중요한 필수품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손목시계가 유행하게 된 이유를 달리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의 학예연구사 도란 카트(Doran Cart) 씨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의 전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는데 가장 달랐던 점은 이것저것 들고 메고 다닐 게 엄청나게 많아진 거예요. 그런데 주는 건 잔뜩 주고 그걸 넣어 다닐 가방을 더 주거나 옷에 주머니가 더 늘어나진 않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회중시계를 어디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그래서 회중시계를 꺼내서 헝겊이나 가죽으로 손목에 묶어서 다닌 게 손목시계의 시작입니다."

영국 전쟁부는 몇몇 시계 장인이 경영하는 공방에 의뢰해 손목시계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음의 사진 및 광고 그림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품들이다.

/출처=위키피디아
▲ /출처=위키피디아

/출처=위키피디아
▲ /출처=위키피디아

/출처=위키피디아
▲ /출처=위키피디아

(하편에 계속)

[남보람 육군 군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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