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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 건드리는 '모던록 1세대' 델리스파이스

  • 홍장원
  • 입력 : 2018.03.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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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스파이스
▲ 델리스파이스


[스쿨 오브 락-47]

예나 지금이나 홍대 부근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다. '홍대 클럽'하면 '리듬에 몸을 맡기는 곳'으로 통용된 지가 이미 한참 됐지만,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 홍대 클럽은 신나는 록을 즐기는 곳이었다. 홍대 주변에 깔린 미술 학원만큼이나 '합주실'을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당시는 록음악 뮤직비디오만 전문으로 틀어주는 카페도 있었고, 건물 곳곳에 록밴드들이 공연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가득 차 있었다.

당시 가장 각광받았던 클럽 중 하나가 '드럭'이었다. 전설적인 한국 펑크 그룹 '크라잉넛'을 탄생시킨 바로 그곳이다. 당시 대형 기획사에 속하지 않고 소규모 레이블 혹은 공연장 기반으로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상업적이지 않은 밴드를 소위 인디 밴드라고 불렀다. 1990년대는 한국 음악계에 인디 바람이 본격 상륙한 시기였다. 크라잉넛과 쌍벽을 이루던 펑크 밴드 '노브레인'을 비롯해 한국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던 여러 밴드가 속속 등장했다. 걸출한 보컬리스트 김윤아를 배출한 '자우림' 역시 인디에서 오버로 넘어와 성공한 밴드 중 하나라고 부를 만하다.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은 소위 '조선 펑크'를 양분하며 뜨거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전혀 다른 음악을 하고도 인디 밴드 출신으로 만만찮은 성공을 거둔 밴드가 있다. 바로 '델리 스파이스'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에 비해 훨씬 말랑말랑한 '모던록'을 하는 밴드였다. '우는 땅콩(크라잉넛)'이나 '뇌가 없음(노브레인)'과 비교해 자극적인 맛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먹으면 중독되는 달콤한 마카롱처럼 소리 없이 찾아들어와 이내 귀에 멜로디가 계속 감기는 치명적인 매력을 자랑했다. 어찌 보면 대선배인 산울림의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었는데, 한국형 사이키델릭 밴드였던 산울림만큼의 '건강한 우울함(?)'은 덜했지만 '반복되는 변주와 청량한 보컬'은 산울림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제 막 PC통신이 개화했던 1990년대 문화를 대변하듯 당시 천리안, 나우누리와 함께 PC통신 급성장에 한몫을 했던 '하이텔'을 통해 결성됐다. 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김민규가 1995년 하이텔 모던록 감상 모임에서 U2나 R.E.M(미국 대학 밴드 문화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밴드로 1990년대 그런지 밴드가 탄생하는 데도 상당한 음악적 영감을 줬다) 같은 음악을 하려 한다는 글을 올렸다. 베이스를 치는 윤준호가 모임에 가세했고, 이제는 밴드를 나간 오인록과 이승기 등이 참가한다. 밴드의 초기 주축인 김민규와 윤준호를 제외한 다른 멤버는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잦았는데, 이는 추후 후술하기로 한다.

델리스파이스
▲ 델리스파이스
이들이 1997년 내놓은 첫 번째 앨범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는 아직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명반이다. 한국형 모던록의 문을 확 열어젖힌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당초 타이틀곡은 '가면'이었지만 2002년 영화 '후아유'에 '챠우챠우-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삽입되면서 지금 대중에게 친숙한 것으로 따지자면 '챠우챠우'가 압도적인 상황이 됐다. 사실 이 곡은 델리 스파이스 1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란 범주에서 벗어나 '델리 스파이스' 밴드 인생 전반에서 가장 돋보인 곡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지금의 델리 스파이스를 있게 했고, 델리 스파이스를 전혀 모르던 사람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곡이다. 몇 단어 되지 않는 가사에 서정적인 리프와 잔잔한 기타솔로를 붙여서 수많은 '델리 스파이스' 워너비를 탄생시켰다.

<챠우챠우>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마치 이상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반복적인 가사는 1990년대 특유의 문화가 담뿍 반영된 것이었다. 반복되는 리프와 가사가 인상적인 '너바나'의 그런지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이를 격하게 표현하기보다 내면으로 수렴하며 한차례 갈무리한 무언가를 어렵게 토해놓는 감성이 보인다. 달력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2000년대를 앞두고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 사회에 가득했던 시절, 이들의 음악은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감성 한 자락을 '툭' 건드리고 지나가면서 이내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김민규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역량을 자랑하거나 발성으로 압도하는 '슈퍼스타형' 보컬은 아니었지만 델리 스파이스가 표현하고자 하는 '델리 스파이스형' 음악을 하기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보컬이었다. 이는 마치 산울림의 보컬이 김창완이 아니라 전인권이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산울림과 들국화 모두 한국 음악사에 명성이 깊게 아로새겨진 '거장'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산울림의 반복되는 사이키델릭한 연주에 전인권의 쩌렁쩌렁 울리는 샤우팅이 더해진다면 이는 '뱀의 다리를 그려넣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지는 않는 김민규의 보컬은 '델리 스파이스' 안에서만큼은 노래를 매우 잘하는 가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첫 번째 앨범으로 적잖은 지지세를 확보한 델리 스파이스는 1999년 두 번째 앨범을 낸다. 두 번째 앨범이 나오기 전에도 적잖은 멤버 교체 과정이 있었다. 드럼을 담당하던 오인록이 직장 문제로 밴드를 탈퇴했고 키보드를 담당하던 이승기는 군대 문제로 밴드를 떠난다. 이를 메우기 위해 키보드에 양용준, 드럼에 최재혁이 나선다. 두 번째 앨범은 이들이 음악으로 밥을 먹고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에 있었다. 첫 번째 앨범이 나름 성공을 거뒀는데도 멤버들이 군대와 직장 문제로 밴드를 떠나야 할 만큼 당시 이들은 냉정하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곡을 만들고 노래를 하고 무대에 오르는 역량만큼은 당연히 프로였다. 하지만 계속 이 길을 걸을 것인지를 놓고 마음가짐은 아직 확고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앨범에서도 '달려라 자전거' 등이 나름의 성과를 거둔다. 이 곡은 김민규와 함께 보컬을 겸하는 윤준호가 불렀는데(곡을 윤준호가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상 김민규·윤준호 더블 보컬 체제로 밴드가 굴러가고 있었다. 밴드는 의도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배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페셔널을 추구하는 밴드는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의도적인 분업화'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또 이 앨범에는 산울림의 곡인 '회상'을 리메이크해 실으면서 이들이 분명 산울림의 영향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도 했다.

<달려라 자전거>

그대와 첨 만났지 반짝이는 쇼윈도 해맑은 여름

어느날 나른한 오후였어 너의 모습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왠지 모를 끌리는 그 느낌이



그대가 전해준 기분좋은 이 피곤은 지친 나를 오히려 깨워줘

매일 매일 스쳐 지나던 우리 동네 골목길 너와 함께라면

신기하게 전혀 새로운 걸



야윈 어깨 젖은 눈길 그래 너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귀여운 그 모습에 함께 할거야 내리기는 정말 싫어



후략



델리 스파이스는 바로 이듬해 세 번째 앨범 '슬프지만 진실'을 내놓고 다소 달라진 행보를 보인다. 앨범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소속사와 갈등이 불거지며 상당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한 방송사로부터 타이틀곡 '고양이와 새에 관한 진실'을 비롯해 4곡이나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달라진 이들의 분위기는 가사로 살펴보자. 전작 앨범의 설렘과 파릇파릇함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끊임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우울감뿐이었다.

<고양이와 새에 관한 진실>

길을 걷던 한 소년은 물었지

엄마 저건 꼭 토끼같아 라고

심드렁한 엄마는 대답했지

얘야 저건 썩은 고양이 시체일 뿐이란다

오 뒤틀린 발목 너덜 너덜해진 날개를 푸드덕거려도 보지만

날 수 없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누가 쳐다나 보겠어



길을 떠나던 한 소녀는 물었지

아빠 저건 꼭 토끼같아 라고

무표정한 아빠는 대답했지

얘야 저건 썩은 고양이 시체일 뿐이란다

오 뒤틀린 발목 너덜 너덜해진 날개를 푸드덕거려도 보지만

날 수 없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누가 쳐다나 보겠어



오 뒤틀린 발목 너덜 너덜해진 날개를

푸드덕거려도 보지만

날 수 없는 작은새 한 마리를

누가 쳐다나 보겠어



하지만 이 지독함 우울감이 밴드에는 어찌 보면 약이 됐다. 이후 밴드의 최전성기를 이끄는 두 개 앨범을 연달아 팡팡 찍어낸다. 2001년 9월 나온 4집 'D'와 2003년 1월 나온 'Espresso'가 주인공이다. 'D'에 실린 '항상 엔진을 켜둘께'만 봐도 한층 밝아진 이들의 행보를 느낄 수 있다. 제목부터 건강하다. 24시간 엔진을 쉬지 않고 가동하겠다는 뜻이니 얼마나 열정적인 내용인가. 가사 역시도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힘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항상 엔진을 켜둘께>

휴일을 앞둔 밤에 아무도 없는 새벽

도로를 질주했어 바닷가에

아직은 어두운 하늘 천평궁은 빛났고

차안으로 스며드는 찬공기들

기다릴께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께



너와 만난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바닷가에 다시 또 찾아와

만약 그 때가 온다면 항상 듣던 스미스를

들으며 저 멀리로 떠나자

기다릴께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께



후략



그리고 뒤이어 나온 2003년 앨범 'Espresso'는 델리 스파이스 역사상 가장 히트한 타이틀곡이 실려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삽입됐을 정도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요로 인정받는 곡이다. 바로 '고백'이다. 델리 스파이스는 마치 이 곡을 만들기 위해 '너의 목소리도 들었다'가 '자전거도 탔다'가 한때 지독한 우울감에 빠져 고양이 시체를 상상했다가, 항상 엔진을 켜두는 긍정의 힘을 익힌 것 같다. 공연 때마다 이 곡을 찾는 수요가 끊이지 않아 웬만하면 이 곡이 공연 리스트에서 빠지는 법이 없을 정도다. 이 곡 역시 '챠우챠우' 못지않게 델리 스파이스를 모르는 사람조차 반드시 한번은 언제 어디에선가 들어봤을 곡이다.

<고백>

중2때까진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야

물론 2년전 일이지만

기뻐야하는 게 당연한데

내 기분은 그게 아냐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

미안해 너의 손을 잡고 걸을 때에도

떠올렸었어 그 사람을

후략



가사의 첫마디만 들어도 오감 전체가 파릇파릇한 중학생 시절로 빨려가는 힘이 있다. 소년 시절 느꼈던 풋풋함이 한층 기교가 무르익은 김민규의 보컬을 타고 곡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중간에 삽입된 기타 솔로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이 가진 가장 큰 힘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만한 '보편적인 정서'를 미려하게 표현해내는 데 있다. 이는 델리 스파이스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 장르가 보편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때 '직업인으로의 음악인'의 길을 놓고 고민했던 상념의 흔적이 묻어서이기도 하다. 대중이 델리 스파이스에게 기대하는 것이 손이 빨라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기타 솔로나, 살벌하게 밟아대는 드러머의 더블베이스, 끝없이 오르는 보컬의 고음, 그루브 넘치는 베이시스트의 슬래핑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적의 궁합을 자랑할 만한 것은 역시 원점으로 돌아가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보편적인 것'에 있었다.

이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의 음악 장르 역시 초기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고(래퍼와 함께 작업을 한 두 번째 앨범에서 볼 수 있듯이 도전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이 델리 스파이스에 원하는 것이 전형적인 것이었을 뿐) 한때 우울함으로 무장한 앨범을 내놓고 방향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2006년, 2011년에 두 장의 앨범을 더 내놓는다. 멤버 교체는 잦았지만 아직까지도 엄연한 현역이다. 추천곡은 앞서 거론한 모든 곡을 꼽고 싶다. 아련한 추억을 씹고 싶을 때 '고백'을,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싶을 때 '항상 엔진을 켜둘께'를 들으면 된다. 신날 때는 '달려라 자전거'를, 기분이 복잡 미묘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챠우챠우'를 권하겠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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