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순경 役 고규필 "질리지 않는 배우 될게요"

  • 김시균
  • 입력 : 2018.08.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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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양유창 기자
▲ /사진=양유창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21] 사람 사는 일은 모르는 거라고,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예기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 큰 불평 불만 없이 꾸역꾸역 닥쳐오는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서 말이다.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데뷔 25년 차 배우 고규필(36)도 그렇다. 그에게 부여하고 싶은 몇 가지 수식어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쩌다가' '운 좋게' '하다 보니'. 그는 정말이지 어쩌다가, 운 좋게, 하다 보니 배우가 된 조금 희한한 케이스다.

때는 바야흐로 1993년. 볼살이 바늘로 찌르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포동포동하던 열한 살 소년 고규필은 충동적으로 연기학원을 끊는다.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너는 그냥 씨름선수나 하라"는 또래들의 짖궂은 놀림에 대한 반발심. 다른 하나는 집에서 혼자 모험 영화 '구니스'(1985)를 보고 푹 빠져든 경험. "이거다!" 싶어 어머니한테 졸라 2주 정도 다니던 찰나, 본의 아니게 어린이 영화 주연에 캐스팅된다. 이준익 감독의 데뷔작 '키드 캅'(1993)이었다.

최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난 고규필은 "한 자리 비어 급하게 뽑힌 거"라며 "(연기학원에서) 푸짐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데려가더라"고 했다. "(저는) 한 살 때부터 뚱뚱했어요. 연기요? 그런 거 몰랐어요. 누군진 기억 안 나는데, '춤 출 줄 아냐' 해서 막춤을 췄더니 뽑아주시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10대 시절 그는 '키드 캅'을 빼면 아무런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는다. 애초 연기에 진지한 관심 같은 건 없었다. 논다는 느낌으로 해본 것이 다였고, 어머니도 아들이 배우되는 걸 크게 바라진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리 뒤뚱, 저리 뒤뚱 하는 아들 연기는 부모가 보기에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유튜브에서 '키드 캅 1993'을 치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당시 그와 함께 출연한 김민정, 정태우, 이재석, 장영철은 이미 아역계 각광받던 스타들이었기에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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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즈캅'(1994)에 어쩌다가 출연하게 된 열한 살 꼬마 고규필은 이후 10여년 간 연기와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

그가 배우 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그로부터 10년 후. 이 역시 어쩌다가, 운 좋게, 하다 보니 된 쪽에 가깝다. 어울리던 친구 무리가 그 몰래 KBS 탤런트 공채 원서를 함께 냈다. 고규필은 "사전에 말도 안 하고 같이 원서를 냈더라"며 "웃긴 건 걔네들 다섯 명은 다 떨어지고 나만 붙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여하튼 그리된 거였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배우 길을 쭉 걸어보기로 한다. 무명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좌절도 하고 의기소침해진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배우'라는 생각을 부인해본 적은 없었다. '육두문자맨' 마준규의 욕설 전수자 매니저('롤러코스터'(2013)), 수화기 너머 아내에게 "왜 욕을 해"라며 침울해하던 순경('베테랑'(2015)) 등 작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번번이 선보이며 대중에게 조금씩 눈도장을 받고 있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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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롤러코스터'(2013)에서 배우 고규필은 '육두문자맨' 마준규의 매니저로 분했다. 극 말미 그가 퍼붓는 쌍욕 연기가 일품이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오늘 인터뷰한다고 하니 가족들이 뭐라고 하던가요?(그는 36년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머리를 긁적이며)얘기 안 했어요. 쑥스럽잖아요. 어머니가 자랑하시는 거 좋아해서 일단 모른 척하고 나왔죠.

대뜸 그는 "명동역 신세계백화점 사거리에서 대각선 방향 쪽에 있는 호텔 언덕배기를 쭉 지나서 왔다"고 말했다. "거기만 지나치면 항상 좋은 일이 생기더라"며 씨익 웃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테랑' 후반부, 오 팀장이 총을 쏴 모두가 바닥에 몸을 묻는 바로 그 장면을 찍은 장소. 고규필이 연기한 순경이 놀라 옆으로 자빠질 때, 그 순간이 썩 재미있게 담겼다. 당시 세간에 꽤나 회자된 장면이다.

그는 "나만의 소중한 명소"라며 "바로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촬영 때랑 똑같은 표정과 자세로 몇 초간 있곤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 말할 때 짓는 미소가 영락없는 소년의 그것이었다.

-벌써 데뷔 25년 차예요. 출연 분량을 떠나 얘기해보자면 대표작이 세 편 정도 있는 것 같은데. 열한 살에 출연한 '키드 캅'(1993), 하정우 배우가 직접 연출한 코미디물 '롤러코스터'(2013),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천만영화 '베테랑'(2015)이 있죠. 첫 번째는 주연이었고, 두 번째는 조연 비중이었고, 세번 째는 단역이었어요. 기이하게도 역순으로 갈수록 극중 비중이 커지네요(웃음). 우선 '키드 캅'부터 얘기해 볼까요. 당시 열한 살 꼬마였죠.

▷근데요, 데뷔 25년 차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다 한번 하게 된 거라…. 음, '키드 캅' 주인공들이 당시 아역계 엄청난 슈퍼스타였어요. 김민정, 정태우 같은 친구들 틈에 같이 연기한다니 얼마나 흥분됐겠어요. 그 덕에 저도 동네에서 꽤 유명해졌죠. 함께 놀면서 촬영하는데 어깨가 괜히 으쓱해졌고요. 영화가 그해 개봉(7월 17일)하고 한 달 정도 계속 팬레터가 왔어요. 매일 7~8개씩이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죠.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으니 그는 쑥스러운지 말해주진 않았다. "기억이 안 난다"고만 했다.

/사진=양유창 기자
▲ /사진=양유창 기자

-'키드 캅'이 이준익 감독 데뷔작이었어요. 애석하게도 '나 홀로 집에' 아류작이라며 갖은 혹평에 시달린 비운의 영화였죠. 2만명도 안 봤고요. 하지만 당시 또래들 사이에선 꽤나 인기였다고 들었어요. 그때 연기 경험이 배우가 돼야겠다는 다짐으로는 이어지지는 않았나요.

▷일단 출연 전에 연기학원 2주 다닌 게 전부였어요. 연기 경험이 없었죠. 부모님도 '키드 캅' 보시더니 바로 그러시더라고요. "규필아, 너는 연기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웃음) 그 뒤로 고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연기에 대해선 쭉 잊고 지냈어요.

-차기 작이 이 감독님 '황산벌'(2003) 단역이었으니 10년간 공백이 있었어요. 그사이 연기는 아예 안 하신 거네요.

▷완전히 동떨어져 지냈어요. '키드 캅'에 딱 한 번 출연했다고 동네에서 '투캅스'라며 늘상 놀림만 받았죠.

-그 시절 어떤 아이였어요?

▷인기가 없었어요. 그래도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친구들은 많았지만요. 공부는…. 초등학교 때 제일 잘한 것 같아요. 키는 초등학교 때가 제일 컸고요. 그러다 성장이 빨리 멈춰서 고교 때는 중간 정도 덩치였어요.

-연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싹튼 계기라면.

▷대림고 3학년 때였어요. 어울리던 친구들 대여섯 명이 배우되겠다고 전부 연기학원 다니더라고요. 걔네들이랑 어울려야 하니 저도 함께 따라 다녔죠. 그때도 연기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다 전문대(백제예술대 방송연예과. 후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편입한다)에 들어갔는데, 2002년 겨울이었나요. 친구들이 저 몰래 KBS 탤런트 공채에 같이 원서를 냈더라고요. 그걸 저만 붙었던 거고요.

얼떨결에 원서가 붙자 곧바로 2차 면접일이 다가온다. 1000명 중 600명을 뽑는 것이었으니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이 면접실로 들어갔고, 전날 받아 외운 대사를 쳤다. 고규필은 "사극이었는데 혀도 꼬이고 계속 틀리더라"며 "아무런 질문도 없어 그냥 떨어진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떨결에 이번에도 3차까지 간다.

-이때부터 본 게임이었겠네요.

▷3차부턴 한 명씩 면집실로 들어갔어요. 준비는 나름 열심히 했는데 혼자 들어가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삐질삐질 나더라고요. 너무 긴장해서 이름도 얘기 안 하고 바로 연기부터 했어요. 그게 귀여우셨는지 이것저것 질문이 들어오대요.

-이를테면.

▷면접관 한 분이 "골프를 그렇게 잘 쳐?"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죠. 골프채 한 번 안 쥐어 봤거든요. 그래서 "안 쳐봤습니다"라고 했죠. 다들 의아해 하시대요. 알고 보니 장난친다고 친구들이 제 원서 특기사항에다 고급 스포츠들만 잔뜩 적어놓은 거였어요. 폴로, 승마, 레이싱 같은. 이실직고했어요. "사실 이렇게 시험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여기까지 올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친구들이 장난친다고 제 이름으로 원서를 낸 것 같습니다. 저 특기사항에 있는 거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됐다"며 다들 웃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3차를 붙었는데 '아, 여기까지 온 건 다 이유가 있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최종까지 갔고 KBS 20기 공채 탤런트가 됐죠.

-친구들이 은인이네요. (웃음) 주변에서 굉장히 놀랐겠는데요.

▷처음엔 다들 안 믿었어요. 부모님이 주변 친척들한테 "우리 규필이가 탤런트 됐다"고 자랑하시면 어떤 분은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규필아, 개그맨 된 거 축하한다." 반문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근데 왜 탤런트가 됐냐"며. (웃음) 어쩌겠어요. "저도 신기해요"라고 했죠. 사실이잖아요.

/사진=양유창 기자
▲ /사진=양유창 기자

당시 KBS 공채 탤런트 20기는 정경호, 신동욱, 지현우, 이현정 등. 그중 한 살 밑인 정경호(35)는 현재 고규필과 둘도 없는 단짝이다. 고규필은 "우리 20기가 KBS 홈페이지에서 원서가 공개된 첫 기수"라며 "가나다순으로 열람이 가능했는데 내 조회 수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예쁜 여자 동기들보다도 클릭 수가 월등했어요. '아, 저런 친구도 탤런트가 되나' 싶으니 반복 확인한 거 아니었을까요.(웃음)"

-그러고 바로 첫 드라마 '낭랑 18세'(2004)에 출연하셨어요.

▷공채되고 처음 찍은 거예요. 연수 끝나고 3개월 후에 방송국 PD님들이 계신 6층에서 전화가 왔어요. 대본 받아가라고요. 거기 친구가 1·2·3이 있는데 너가 3번이라며. 그러다 좀 길게 출연한 게 '불멸의 이순신'(2004~2005)이었죠. 돌쇠 역이었는데 애초 분량보다 많이 나왔어요.

-어느 정도 분량이었나요.

▷원래는 104회 중에서 초반 10회만 나오는 거였어요. 졸병 5명이 첫 전쟁에서 패하면서 다 죽게 되는데 돌쇠가 그중 하나였죠. 그러다 7~8회 차 찍을 때 소문이 들려왔어요. 5명 중 잘하는 1~2명만 살려서 계속 출연시키겠다고요. 그 1명이 돼서 80회까지 출연한 거죠. 8~9개월, 거의 1년간 찍었어요. 제 생애 제일 길게 촬영한 작품이에요. 그 덕분에 연기 대하는 게 좀 더 진지해진 것 같아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연말 시상식 자리였어요. 출연진이 다들 모여 있었죠. 저는 구석에 앉아 있는데 강부자 선생님이 제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직접 오셨어요. 그러면서 저한테만 말을 건네시더라고요. "'불멸의 이순신' 봤는데 거기 나오는 친구 맞지?" 놀라서 "예! 예!" 했죠. 그러니 "너무 잘하더라. 힘내라"며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대단히 감격스러웠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죠.

▷또 하나 있어요. 시상식 중 잠시 화장실을 갔다가 김명민 선배님(이순신 역)과 마주쳤어요. 사실 제가 80회를 나왔어도 큰 배역이 아니잖아요. 저를 잘 모르실 줄 알았어요. 그런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돌쇠야, 혹시 (내가) 상 못 받을 수도 있는데 받게 되면 박수 열심히 쳐주렴." "아휴, 그럼요. 상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니, 모르지" 하며 허허 웃고 돌아가셨고요. 명민 선배님이 정말 그날 연기 대상을 받으셨어요. 제 일처럼 기뻐서 구석 자리에서 얼마나 박수를 쳤는지.(웃음)

봉준호 감독
▲ 봉준호 감독 '마더'에서 배우 고규필은 남고생 뚱뚱이를 연기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이후 그는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조·단역 출연을 이어간다. 극중 비중이 미미해도 괘념치 않았다. 찾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그렇게 추창민 감독의 '사랑을 놓치다'(2006),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 박기형 감독의 '폭력써클'(2006)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서울 1945'(2006) '드라마시티-틈'(2007) '사랑에 미치다'(2007) '달려라 고등어'(2007) 같은 TV 시리즈물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친다. 그러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 '뚱뚱' 역에 발탁된다.

뚱뚱은 '마더' 중후반부 골목길 신에 처음 등장한다. 준모(원빈)의 마더(김혜자)가 몰래 훔쳐보는 가운데 여고생 흉터(이미도)를 괴롭히는 두 남고생 중 하나. 그러다 험상궂은 숯불맨(곽도원)이 나타나 달아나고 몇 장면이 흐른다. 어둑해진 그날 밤. 둘은 진태(진구)에게 붙들려 흠씬 두들겨 맞은 뒤다. 더벅머리 뚱뚱은 진태에게 아정(문희라)의 휴대폰에 담긴 비밀을 이실직고한다. 그 대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아정이 핸드폰 거기 나온 사진들 공개되면 여러 사람 다칠 텐데…. 걔가 다 찍어놨거든…. 변태폰으로…. 자기랑 잔 남자들."

-뭐랄까요, 어두컴컴한 한밤중 파죽이 됐으면서도 '뭐 어쩔건데,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표정이죠. 저 장면이 좀 재밌더라고요. '너 이제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들고.(웃음) 단역이었지만 나름 임펙트 있게 연기했다고 생각해요.

▷'마더'가 제가 교복 입고 찍은 마지막 영화였어요. 오디션 보기 전에 작은 소문을 들었는데요. 봉 감독님이 '폭력써클'을 봤는데 잘하는 배우를 찾았다는 거였어요. 그러고 좀 지나 캐스팅 디렉터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오디션을 보러간 거죠. 처음에는 조감독님 앞에서 6㎜ 카메라로 오디션을 보고, 마지막엔 봉준호 감독님 앞에서 진구 형이랑 함께 오디션을 봤어요. 봉 감독님을 처음 뵙는데, '폭력써클' 잘 봤다고 악수를 청해주시더라고요. 많이 보지도 않은 영화인데 그걸 봐주셨다니까 기쁘더라고요. 그때 본 오디션이 아마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길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오디션 느낌이라기보다 촬영하는 느낌에 가까웠달까요. 봉 감독님이 참 사려 깊은 분이셨어요. 비중 있는 배역도 아닌데 촬영 일주일 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격려하시더라고요. "잘 준비하고 있나요, 걱정 많을 텐데 잘해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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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폭력써클'(2006)에서 배우 고규필은 불량 고교생 나상식을 연기했다. /사진제공=쇼박스

-봉 감독님이 참고했다는 '폭력써클'은 당시 전형적인 학원 폭력물이었죠. 극중 나상식은 배우가 성인이 돼 찍은 첫 조연 캐릭터인 걸로 알아요. 정경호 배우가 주인공이고, 요새 잘나가는 조진웅 배우는 함께 조연으로 출연했고요.

▷나상식은 속된 말로 'X밥' 캐릭터였어요. 오디션을 뚱뚱한 친구로 준비해서 갔어요. 그랬더니 조감독님이 "그 배역은 너랑 안 어울리고 이미 할 사람이 있다"고 하시대요. 그게 (조)진웅이 형이었던 거죠. 당시 진웅이 형이 상당히 뚱뚱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게 된 게 나상식이에요. 복학생인데 처음에 군기 좀 잡고 짱 먹으려 하고 그러다 쳐맞고 말 그대로 꼬봉이 되는 거죠. 이 영화 찍을 때 추억이 많아요. 6개월 정도 부산에서 멤버들이랑 숙소생활을 했거든요. 모텔 숙소 한 층을 아예 빌려서요. 거기서 다 문 열고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뒹굴고 그랬죠.

'폭력써클'은 극장 흥행엔 참패했다. 2만4682명이 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권상우 주연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가 그러했듯 이 영화 또한 청소년들 사이에 무수히 불법다운로드 됐다. 어쨌거나 '폭력써클'을 계기로 '마더'에서 호연한 그는 촬영이 끝나고 곧이어 공익근무에 들어간다. 때는 200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사진=양유창 기자
▲ /사진=양유창 기자

-소집해제 이후 처음 찍은 영화가 롤러코스터'(2013)였어요. 그사이 별 다른 작품활동이 없었네요. 공백 기간이었던 건가요.

▷작품이 한 편도 안 들어왔어요. 일이 없으니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던 시기였어요. 나이가 서른 넘었는데 일이 없으니 수입이 없죠. 공익근무 전에는 잘나가진 않았어도 조금씩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이후에 아예 단절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연기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저를 응원해주던 어머니조차 "다른 일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을 정도로. 그러다 (정)경호(KBS 공채 탤런트 20기 동기)가 주인공 마준규에 캐스팅되면서 저를 매니저 배역으로 추천해줬어요.

-그러고 보면 공채 탤런트가 된 것도 그렇고, '롤러코스터' 캐스팅 건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에게 힘 입은 바가 적지 않네요.

▷그렇죠, 기존에 저는 힘들어도 내색을 잘 안 했어요. 이 시기 배운 게 있다면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예요. 솔직히 털어놓을수록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더라고요.

'롤러코스터'는 극중 '육두문자맨'으로 스타가 된 배우 마준규(정경호)가 주인공이다. 그가 탄 비행기에서 벌어지는 한나절 소동극을 그린다. 상당히 유치한 편인데, 그 유치함 때문에라도 시종일관 배꼽 잡고 웃게 된다. 기내에 있는 사무장, 각 승무원들, 제 신분을 감춘 스포츠지 기자, 모 기업 회장과 여비서, 신혼 부부 등 각 캐릭터들 개성이 저마다 도드라진다.

-배우님은 기내의 모든 소동이 정리된 후 공항 바깥에서 이 영화 클라이맥스를 장식하죠. 버릇없게 구는 마준규한테 속사포로 쌍욕을 퍼붓는 장면으로요.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다가 이 신에서 다시 폭소하고 말았어요.(웃음) 이 신을 위해 70일 동안 욕만 연습했다면서요.

▷여지껏 받아본 대본 중 대사가 가장 길었어요. 한 페이지 자체가 다 욕이었어요. 굉장히 연습했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조용하게, 그리고 친구들이랑 캠코더로도 찍고. 근데 막상 현장에선 어색해져서 잘 못하겠더라고요. 침울해져 있으니 정우 형이랑 경호가 잘 타일러줬어요. 10번 넘게 NG가 난 끝에 겨우 오케이났고요. 그 장면 보시면 쌍욕 퍼붓고 밴에 타서 문 닫고 그냥 가버리잖아요. 보이진 않지만 사실 제가 차 안에서 펑펑 울었어요. 갑자기 굉장히 서글퍼지더라고요. 일이 긴 기간 없다보니 힘들고 그랬는데 시원하게 토해내니 그게 좋으면서 또 긴 기간 쌓아둔 게 일거에 밀려왔어요. 배우 일에 대한 회의감이랄까. 연기는 도통 느는 것 같지 않고 괴리감도 들고 그런 복합적인 상태였을 때 이 영화를 찍었으니까요.

-'롤러코스터'가 재기의 발판이었던 거네요.

▷그렇죠. 이후 드라마도 다시 찍고,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에도 캐스팅되고,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님이 저를 찾아주셔서 순경 역에 출연하게 됐고요. 제가 이 연기라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롤러코스터'랑 '베테랑'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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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테랑'(2015)에서 순경으로 분한 배우 고규필은 아내와의 통화 장면에서 선보인 에드리브로 주목받았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베테랑' 순경 역이 뒤늦게 발탁된 거라면서요.

▷오디션 보기 전에 영화 아카데미 단편을 하나 찍었어요. 그걸 보고 류 감독님이 "저 친구 누구냐"며 제 번호를 받아갔다고 해요. '베테랑' 찍는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죠. 근데 오디션 보고 연락이 한참 안 오는 거예요. 주변 친구들은 이미 몇 명 붙어서 액션 연습 들어간다고 할 때인데, 저는 무소식이었던 거죠. 떨어졌구나 싶었어요. 그러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순경 역에 합격됐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대본 처음 받아 읽을 때 어땠나요.

▷제가 작은 미신을 믿어요. 사우나에 가면 모래시계가 중간 즈음일 땐 절대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대본 읽을 때도 그래요. 무조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최대한 정성스럽게 읽죠.

-순경은 거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처음엔 몰랐어요. 대본이 100쪽 정도인데 80쪽에 이르기까지 순경이 안 나오는 거예요. 넘겨도 넘겨도요. 두 시간 정도 지나도 안 나오니 착잡해져서 담배를 두 개비 피웠죠. 아, 너무 기대했구나, 배역이 미미한가보다. 그러다 80쪽 넘어가고 순경이 나오는데 왜 류 감독님이 저를 쓰려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어눌하고 착하고 많이 혼나고 맞는 귀여운 '뚱땡이'를 많이 했던지라 거기 어울리는 캐릭터가 필요했구나 하고요.

-당시 순경이 친 이 대사가 큰 웃음을 줬죠. "여보, 나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어…. 왜 욕을 해?" 여기서 '왜 욕을 해'가 원래는 없던 대사였다고 들었어요. '애는 왜 안 보채?'에서 그냥 끝났으면 조금 평이했을 텐데, 저 한 마디 덕에 대사가 훨씬 재밌게 살아났어요. 어떻게 치게 된 애드리브에요?

▷저 장면을 어찌 하면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을까 한참 고민했어요. 대본 들고 커피숍에서 가만히 읽는데 옆 테이블 젊은 남녀 커플이 좀 거칠게 싸우더라고요. "욕하지 말라고!" 하면서.(웃음) 그걸 가만히 엿듣는데 '어? 괜찮은데?' 싶더라고요. 류 감독님도 굉장히 좋아해주셨고요. 더 놀란 건 극장에서 관객들이 그 신에서 다들 뒤집어지셨다는 거였어요.

연기는 디테일이라고 했다. 저만의 디테일만 잘 살려낸다면 단역도 주연 못지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언뜻 사소해보이는 그의 저 애드리브도 그런 디테일의 힘을 잘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베테랑' 흥행 당시 류승완 감독은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배우들이 디테일을 잘 살려줬어요. 특히 고규필 등 작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까지 제 몫 이상을 해줘서 영화가 더 풍부해졌어요."

-그 신에 이어 막바지에 오 팀장이 쏜 총소리에 전부 다 놀라 자빠지고 엎드려 숨는 신이 있죠. 그 신 또한 배우님이 젤 튀더라고요. 좌측으로 굳은 채로 희한하게 쓰러지죠.

▷좀 튀고 싶었어요. 총 쏴도 혼자서만 서 있어보고 싶었어요. 위치도 딱 전면이잖아요. 잘 보일 수 있게 총성에 맞춰서 정자세, 차렷자세로 있어보자. 감독님도 혼자 서 있다고 뭐라 안 하셨어요. 잘됐다 싶어 준비하는데 세 번째 테이크였을까요. 옆에 분이 넘어지면서 제 다리를 거시더라고요. 넘어질 생각이 없었는데 버티다 그대로 자빠진 거예요. 근데 그게 오케이가 난 거죠.

-'베테랑' 순경 출연 효과가 작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이듬해 OCN 드라마 '38사기공대'에 정자왕이라는 천재 해커로 다시금 조명받았고, 연이어 드라마 4편, 영화 6편에 출연하셨어요. 최근 로맨스물 '너의 결혼식'에선 한 번씩 코믹한 대사를 찔러넣는 구공자 역으로 조연 출연하셨고.

▷아마도 '38사기공대' 정자왕이 '베테랑' 이후 안방극장에서 저를 가장 많이 알리게 해준 조연 캐릭터인 것 같아요. 사기 치며 세금 갈취하는 이야기인데 정자왕이 그중 야동을 좋아해서 정자왕이라 불렸죠. 첫 신부터 야동을 보잖아요. 작업실은 온통 야한 사진으로 도배돼 있고. (웃음) 그래서 주변 벽이 다 모자이크 처리됐죠.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이제 내가 직업 배우로 나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구나. 예전보다 프로답게 나 자신을 생각하며 일하고 있구나' 하고요. 전보다 연기하는 맛도 알겠고 마음가짐이 조금 더 가지런해진 것 같아요.

/사진=양유창 기자
▲ /사진=양유창 기자

-향후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저처럼 생긴 친구들이 악역을 자주 하잖아요. 저는 좀 신선한 악역을 해보고 싶어요. 세 보이는 악역은 많으니까 좀 독특하고 새 느낌 나는 악역요.

어쩌면 그는 이제 막 시작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는 눈여겨봐야 할 하나의 '가능태'다. "오랜 기간 질리지 않는 배우이고 싶다"는 그의 앞날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김시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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