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나 윌리엄스의 상대

  • 정지규
  • 입력 : 2018.09.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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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미더 스포츠-119] 지극히 당연한 얘기라 읽는 이들이 조금 당황스럽겠지만 스포츠는 승리와 패배를 전제로 한다. 달리 얘기하면 승자와 패자가 있다는 뜻이다(물론 종목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승부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나'와 나에게 대적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이 '상대'를 이겨야 한다. 물론 공정한 방법으로 정해진 규칙하에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이겨야 한다.

하지만 승부를 겨룸에 있어서 실력 말고도 환경이라는 변수가 있다. 프로선수들이 상대해야 할 '상대' 외에 감안해야 하는 외부 변수는 관중, 경기장 그리고 심판이다.

관중의 환호는 경기에 집중해야 할 선수들이 고려해야 하는 첫 번째 변수다. 경기에만 집중하게 관중이 없는 곳에서 경기를 한다면 그야말로 "실력(경기력)이 누가 더 좋으냐"로 승부가 결정되겠지만, 그건 프로스포츠가 아니다. 경기를 봄으로써 즐거워하고 돈을 지불하는 관중과 시청자가 있어야 선수들은 먹고살 수 있다. 이 때문에 경험이 없는 선수들에게 관중의 환호(때로는 야유)는 경기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경험과 멘탈 관리는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덕목 중 하나다.

경기장 또한 의외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다 똑같은 규격의 경기장이지만 사실 똑같지가 않다. 인간은 자주 경기한 곳이 익숙하고, 익숙한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다. 낯선 곳에서 편안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이 경기에서 승부를 바꾸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홈 어드밴티지' 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21세 신예 오사카 나오미(19위)가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13일째 여자단식 결승에서
▲ 21세 신예 오사카 나오미(19위)가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13일째 여자단식 결승에서 '테니스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26위·미국)를 2-0(6-2 6-4)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사진=뉴욕 EPA, 연합뉴스

심판은 스포츠 경기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규칙이 정해져 있고 선수만큼 그 규칙을 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이겨야 하기에 당사자들은 공정해지기가 무척 어렵다. 만약 큰 상금이 걸려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순간순간 상황을 판단해 줄 공정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게 심판이다. 하지만 심판은 결국 사람이고 사람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때문에 종종 선수들과 관중은 심판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아가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규모가 커지고 판정 하나에 수많은 돈이 왔다 갔다 하는 현대 프로스포츠에서 심판의 역할과 능력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기가 이겨야 할 것은 상대 선수이지 다른 것들 특히 심판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잘못된 선입견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심판이 경기를 지배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런 경우 사실 이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판단하고, 과도하게 흥분해 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악의는 선수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합당한 처벌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 심판이 개입하는 부당한 경우가 반복되면 해당 종목은 신뢰를 잃고 존립 자체가 순식간에 위태로워진다.

21세 신예 오사카 나오미(19위)가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13일째 여자단식 결승에서
▲ 21세 신예 오사카 나오미(19위)가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대회 13일째 여자단식 결승에서 '테니스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26위·미국)를 2-0(6-2 6-4)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사진=뉴욕 AP, 연합뉴스

지난 9일 뉴욕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펼쳐진 2018 US오픈 여자단식 결승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컸다. 2세트 승기를 잡은 듯 보였던 세리나 윌리엄스는 계속된 경고로 포인트를 잃으며 스스로 무너졌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언행의 결과였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윌리엄스의 '상대'가 오사카 나오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윌리엄스는 라모스 심판과 상대했다. 라모스의 판정이 100%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윌리엄스가 좀 지나쳤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과 테니스 팬들 의견이다.

물론 윌리엄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자신은 정말 코치로부터 받아서는 안 되는 코칭을 받지 않았고, 그렇게 누적된 경고로 인한 실점으로 게임을 망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흔들리는 것은 윌리엄스보다 열여섯 살 어린 오사카에게 더 어울린다. 역대 최다 그랜드슬램 최다 우승 타이기록에 도전하는 윌리엄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론 위대한 기록에 도전하는 윌리엄스이기에 긴장감이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미 '전과'가 있었다. 2011년 US오픈 여자단식 결승에서 상대와의 플레이가 아닌 경고 누적으로 포인트를 잃고, 심판에 대한 불필요한 언행을 보인 바 있다. 결국 이 경기에서도 그녀는 멘탈이 무너지며 우승까지 내줬다.

어쩌면 최다 그랜드슬램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중과 배려다. 생애 첫 메이저 우승과 그에 걸맞은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오사카는 마지막 위닝 샷을 날리고도 환호하지 못했다. 어릴 적 메인 코트 가장 높은 곳에서 우상인 윌리엄스의 플레이를 보며 US오픈 무대를 꿈꿨던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우승 소감을 말하는 것은 국적을 떠나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윌리엄스 또한 오사카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며 오사카의 야유를 의도한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더 이상 윌리엄스의 상대가 심판이 아니기를 바란다. '역사상 최고의 여자단식 테니스 선수'라는 명예는 그다음 문제다.

[정지규 스포츠경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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