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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가슴에 불을 댕긴 조선 여인들의 야시시한 초상화

  • 배한철
  • 입력 : 2015.01.2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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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작 미인도
▲ 신윤복 작 미인도
[한국 초상화 읽기 - 3] “내 가슴 속에 춘정이 넘쳐나니 붓 끝으로 겉모습과 함께 속마음까지 그려냈네(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

조선의 미인도 중 최고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 적혀 있는 제화시(題畵詩)이다.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 가늘고 긴 목, 좁은 어깨는 한눈에 봐도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상이다. 시에서도 볼 수 있듯 초상화 모델은 신윤복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다. 물론 일반 여성이 아닌 기생이다. 이 여인은 어떤 연유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을까.

오늘날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혜원(惠園) 신윤복은 사실 그가 살던 시대만 해도 그저 저잣거리를 전전하던 이름 없는 무명 작가였다.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이 거의 없어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성호 이익의 손자 이구환은 “마치 속세를 떠난 사람 같으며 항간의 사람들과 어울려 동가식 서가숙하며 지낸다”고 묘사했다. 신윤복의 호 혜원은 ‘혜초정원(蕙草庭園)’의 줄임말이다. 혜초는 콩과 식물로, 여름에 작은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의 한 종류다. 스스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빗댄 호이다.

혜원이 유명세를 얻은 것은 근대에 와서다. 1902년 이후 한국에서 미술을 연구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년)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시정촌락의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렸다”고 극찬했다. 신윤복은 양반층의 풍류나 남녀 간의 연애, 향락적인 생활을 주로 그렸다. 특히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이전 화가들이 무관심했던 여인들의 풍속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던 기녀를 주인공으로 기방이나 여속에 대한 관심을 고도의 회화성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중 걸작이 바로 ‘미인도’이다. 가체를 사용한 탐스러운 얹은 머리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길이가 짧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은 저고리를 입었으며 속에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큰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체의 관능미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쪽빛 큰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낸 하얀 버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과 풀어 헤친 진자주 옷고름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초상은 신윤복이 여인을 사랑했던 만큼 가장 공을 들여 그렸다. 그런데 자태는 곱지만 뭔가 모르게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에 손으로는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신윤복은 여인을 사랑했지만 여인도 그러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왼쪽부터) 신윤복 작 연당의 여인, 계월향, 채용신 작 운낭자
▲ (왼쪽부터) 신윤복 작 연당의 여인, 계월향, 채용신 작 운낭자
신윤복이 그린 또 다른 여인 그림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연당의 여인’이다. 툇마루에 앉은 기녀는 만개한 연꽃을 바라보면서 담뱃대와 생황으로 무료함을 달래는 듯하다. 미인도의 여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평양 기생 계월향도 초상화를 남겼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평양 명기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경서(1564~1624년)의 애첩이었다. 1592년 왜장의 목을 벤 김응서가 평양성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뒤 자신은 자결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남논개 북계월향’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면서 조선 의기의 대명사가 됐다. 그녀가 죽은 지 200년이 흐른 1815년 추모의 목적으로 제작됐다. 계월향 관련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표정이 살아 있으며 자태가 곱고 10대 소녀로 보이는 앳된 모습이 잘 느껴지도록 세부 표현에 신경을 썼다.

고종의 어진을 그린 채용신(1848~1941년)이 제작한 운낭자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평안도 가산의 관기였던 최연홍(1785~1846년)이 모델이다. 운낭자는 최연홍의 초명이다. 27세이던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 때 그녀는 관군을 적극 도왔고 조정에서는 이 공로를 높이 사 논과 밭을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기생 신분에서도 해방시켜줬다. 그녀가 사망하자 평양 사람들이 초상을 제작해 봉안했다. 초상화는 일제시대 운낭자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졌다. 풍만하면서도 여성다운 곡선을 강조했지만 사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성모자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배한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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